<김삼기의 시사펀치> 청와대 여민관의 귀환, 속도 조절이 관건

2025.12.23 09:16:42 호수 0호

여민관·위민관 이름의 변천이 던지는 질문

지난 22일, 춘추관으로 첫 출근하는 후배 기자의 모습이 실린 뉴스를 봤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브리핑룸, 새로 걸린 휘장, 이전과 달라진 출입 동선이 한 장의 사진에 담겨있었다. 뉴스를 보자마자 전화를 걸어 “어때?”라고 묻자, 돌아온 답은 짧았다. “아, 진짜 청와대 시대가 다시 열리는구나, 그게 제일 먼저 느껴졌어요.”



공간이 바뀌면 말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기자의 출근길은 언제나 권력의 동선을 가장 먼저 비추는 거울이다. 정치의 변화는 선언이 아니라 이런 장면에서 먼저 체감된다. 기자가 다시 춘추관으로 돌아오고, 브리핑 공간의 상징이 돌아오는 순간, 권력의 중심이 어디로 이동했는지가 비로소 분명해진다.

이재명 대통령의 청와대 복귀는 단순한 행정 동선의 변경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자신을 어떤 언어로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대통령 집무실이 다시 청와대로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어떤 공간이 국정의 중심이 되느냐다.

이 질문의 핵심에는 청와대 비서동의 이름, 여민관과 위민관이라는 정치적 언어의 변천사가 놓여 있다.

청와대 비서동의 이름은 한번도 고정된 적이 없다. 노무현정부에서 ‘여민관’이었던 이 공간이 이명박·박근혜정부를 거치며 ‘위민관’으로 불렸고, 문재인정부에서 다시 ‘여민관’으로 돌아왔다. 하나의 건물에 두 개의 이름이 반복됐고, 그때마다 권력은 비서동을 다른 언어로 규정하며 국정 운영의 문법을 드러냈다.

여민관(與民館)은 ‘국민과 함께하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맹자의 여민동락에서 차용된 이 이름에는 권력이 국민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성립해야 한다는 정치 인식이 담겨있다. 국정의 정당성은 위에서 내려오는 선언이 아니라, 함께 논의하고 함께 책임지는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뜻이다.


정책의 정당성은 결과 이전에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정치는 결정의 기술이 아니라 합의의 기술이라는 믿음이 전제돼있다. 이 문법에서 국정은 설명과 설득, 조정과 공개적 갈등 처리 위에서 작동한다. 여민의 정치는 느려 보이지만, 그 느림 속에서 신뢰와 정당성이 축적된다.

반대로 위민관((爲民館)은 ‘국민을 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어 선의로 읽힌다. 그러나 이 언어는 구조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쪽과 그 결과를 수용하는 쪽을 나눈다. 이 문법에서 국정은 정치라기보다 통치에 가깝고, 숙의는 결단으로, 설명은 속도로 대체된다. 빠른 결정과 신속한 실행은 효율과 유능함의 지표로 평가된다.

문제는 어느 쪽이 옳으냐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비서동 이름이 너무 쉽게 교체돼왔다는 점이다. 여민관이 진보 정권의 상징처럼, 위민관이 보수 정권의 표어처럼 소비돼온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공간의 이름이 정치 철학의 축적이 아니라 정치적 차별화의 도구였다면, 그것은 정치의 장이 아니라 슬로건의 간판에 불과하다.

이번 이재명정부의 청와대 복귀에서 주목할 대목은 ‘다시 여민관으로 불린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대통령의 실제 집무 공간이 여민관에 자리 잡는다는 점이다.

본관은 외빈 접견과 국가 행사 중심으로 활용하고, 국정의 일상은 여민관에서 이루어지는 구조다. 대통령과 비서실장, 정책실장, 국가안보실장이 같은 건물, 이른바 ‘1분 거리’ 안에 배치된다는 점도 상징적이다. 물리적 거리는 곧 정치적 거리다.

청와대의 구조는 애초에 이 두 기능을 분리해 설계돼있었다. 본관은 상징과 의전의 공간이고, 여민관은 실무와 조정의 공간이었다. 과거 대통령 집무실이 본관에 있을 때 참모진과의 거리는 약 500미터에 달했다.

이 물리적 간극은 곧 소통의 간극으로 이어졌고, 정치의 리듬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번 배치는 그 단절을 구조적으로 해소하겠다는 선택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름과 배치만으로 국민과 함께하는 여민 정치가 자동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여민관이 위민관으로 불렸다가 다시 여민관으로 불린다고 해서 곧바로 여민의 정치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여민관이 단순한 보고와 회의의 공간으로 소비되고, 실질적 결정이 다른 곳에서 이뤄진다면, 이 변화는 또 하나의 소비로 끝난다. 여민은 말이 아니라 구조로 증명돼야 한다.

여민의 정치는 느려 보인다. 설명이 길고 절차가 많다. 그러나 이 느림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충분히 설명된 정책은 쉽게 되돌려지지 않는다. 반대로 위민의 정치는 빠르다. 결단은 즉각적이고 실행은 신속하다. 그러나 설명되지 않은 결정은 반복될수록 저항을 부른다.

한국 정치가 끊임없이 겪어온 정책 되돌림의 역사에는 이 속도의 역설이 깔려 있다.


그런데 이 구분은 최근 이재명정부의 행보 앞에서 다시 점검될 필요가 있다. 청와대 복귀와 여민관 중심 운영이라는 상징은 분명 ‘함께하는 정치’를 호출하지만, 실제 국정의 리듬은 오히려 속도의 정치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주요 정책과 쟁점은 빠르게 정리되고, 반대와 이견은 충분한 조율의 대상이기보다 돌파의 대상으로 다뤄지는 장면이 잦다. 설명은 결정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정 이후의 보완 절차처럼 다뤄진다. 그 과정에서 정치는 설득의 시간이 아니라 속도를 관리하는 기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공간은 여민관인데, 작동 방식은 위민관의 문법을 닮아가는 정치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여민관에서 정치가 깊어지기보다 여민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위민의 방식’이 실행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함께 논의하는 형식은 유지되지만, 결정의 방향과 속도는 이미 설정돼있는 정치는 겉으로는 여민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위민의 통치에 가깝다.

문제는 속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도가 여민의 언어를 잠식할 때다. 여민의 정치는 느려 보여도 정당성을 축적하지만, 위민의 정치는 빠르되 설명이 생략되면 불신을 키운다. 만약 여민관이라는 공간에서 위민의 속도가 계속 강화된다면, 청와대 복귀가 상징했던 정치의 회복은 빠르게 소진될 수 있다.

결국 관건은 장소가 아니라 방식이다. 여민관에 집무실을 둔다고 해서 정치가 자동으로 여민이 되지는 않는다. 여민관에서도 충분히 위민의 방식으로 통치할 수 있고, 최근의 속도는 그 가능성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이정부가 여민관에서 속도를 조절하며 정치를 복원할 것인지, 아니면 속도를 유지한 채 여민관을 통과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전자는 정치의 회복이고, 후자는 통치의 세련화다. 그 선택에 따라 여민관은 민주주의의 공간이 될 수도, 속도를 정당화하는 무대에 머물 수도 있다.

청와대의 의미는 공간에 있지 않다. 어떤 언어가 그 안을 지배하느냐에 있다. 비서동의 이름이 더 이상 정권의 구호로 소비되지 않고, 실제 정치의 방식으로 증명될 때, 청와대는 다시 국민의 공간이 된다.

이번 청와대 복귀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반복돼온 이름의 변천을, 이번만큼은 정치의 성숙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이 지금, 다시 열린 청와대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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