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정월대보름, 당시 대학생이던 필자가 들판에서 불붙은 깡통을 돌리던 순간은 단순한 쥐불놀이가 아니었다. 처음엔 팔 전체를 원으로 크게 움직여야 깡통이 돌았다. 하지만 속도가 붙자 팔은 더 이상 원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 직선으로 흔들기만 해도 깡통은 원을 스스로 그렸다.
외형은 원이었지만, 그 원을 유지시키는 힘은 직선이었다. 그 순간 필자에게 다가온 느낌은 단순한 기교의 변화가 아닌 ‘겉은 원이지만, 본질은 직선’이라는 원운동 원리의 깨달음이었다.
당시 필자는 이 전환의 순간을 ‘삼기점’이라 명명했고, 아이디어 노트에 기록했다. 이후 이 개념은 정치, 경제, 사회, 문명 전환을 꿰뚫어 해석하는 필자만의 고유한 렌즈가 됐다.
원운동의 표면성과 직선운동의 내적 동력
원운동은 완전한 운동이 아니다. 직선으로 뻗으려는 관성과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잠정적으로 타협한 결과일 뿐이다. 즉, 원은 형태고 직선은 힘이다. 이 구조는 세상이 굴러가는 진짜 원리를 보여준다. ‘푸코’의 관점에서 원운동은 규율·제도·관성의 반복 장치며, 직선은 그 반복을 깨고 새로운 질서를 여는 힘이다.
‘들뢰즈’의 사유로 보면, 원은 영토화된 질서고, 직선은 그 질서를 벗어나는 탈영토화의 흐름이다. ‘베르나르 스티글러’가 말한 기술철학적 프로세스의 외부화도 같은 구조다. 안정적 구조 속에 축적된 긴장이 어느 순간 직선적 돌파로 문명을 바꾼다.
필자가 45년 전 들판에서 본 원운동 역시 외형만 안정된 것이었다. 그 원을 떠받치던 힘은 이미 방향을 바꾸려는 직선이었다. 삼기점은 바로 이 내부 변화가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순간이다. 원의 형태는 남아 있지만, 본질적 힘은 이미 다른 궤도를 향해 있다.
정치의 삼기점, 반복의 원 넘어 이탈하는 국민의 직선
정치는 가장 안정된 원처럼 보인다. 선거는 일정 주기로 반복되고, 여야와 진보·보수의 구도는 회전하듯 반복된다. 언론은 이 회전을 해설하면서 정치의 원을 세상에 알린다. 그러나 정치를 실제로 움직이는 힘은 원이 아니다. 국민의 삶에서 솟아오르는 직선적 가치가 정치를 변화시킨다.
“우리 삶은 나아지고 있는가?” 이 단순한 직선적 질문 하나가 정치의 모든 원을 무력화하기도 하고, 새 축을 형성하기도 한다. ‘라투르’가 설명하듯, 국민은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정치 흐름을 직접 바꾸는 존재다. 과거의 정치는 원의 규칙을 유지하려 했지만, 오늘의 정치는 직선적 변화의 방향성을 요구한다.
정치의 삼기점은 바로 이 순간이다. 국민의 직선이 정치의 원을 재편하는 순간, 정치는 새로운 운동으로 넘어간다. 원 안에 머물려는 정치세력은 더 빠른 자기회전만 반복하고, 국민은 그 원을 떠나 직선의 궤도로 이동한다.
경제의 삼기점, 순환경제에서 속도와 흐름의 경제로
경제는 오랫동안 순환의 원으로 설명됐다. 생산·소비·투자·성장의 순환은 산업시대의 안정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 경제는 순환이 아니라, 흐름과 속도의 직선 구조다. 데이터는 왕복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자본은 국경을 초월해 계단식으로 확장된다.
AI는 반복을 더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미래의 방향을 예측하는 기술이다. 다시 말하면 직선적 사고를 구현한 기술이다. ‘들뢰즈’ 관점으로 보면, 산업경제는 영토화된 원의 경제였고, 디지털경제는 탈영토화된 흐름이다. 자본은 연결·속도·의미를 기반으로 이동한다.
정책은 여전히 순환경제의 원으로 움직이지만, 시장은 이미 속도의 직선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괴리가 더 벌어지면 경제의 삼기점이 발생한다. 과거의 질문이 ‘얼마나 크게 돌릴 것인가’였다면, 오늘의 질문은 ‘어디로 얼마나 빨리 갈 것인가’다. 경제의 흐름이 원에서 직선으로 이동한 것이다.
사회의 삼기점, 원형 질서의 붕괴와 직선적 삶의 등장
과거 사회는 하나의 원으로 살았다. 비슷한 시기에 학교에 들어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은퇴하는 일정한 궤도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원으로 묶이지 않는다. 각자 다른 욕망과 세계관을 따라 직선처럼 각자도생한다.
현상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지향성을 가진 신체적 존재로 각자의 신체와 의식은 고유한 방향성을 갖는다. 하지만 제도는 원의 관성에 사로잡혀 있다. 연공서열, 정년제, 획일적 입시제도 등은 모두 과거 원형 사회가 남긴 유물이다. 반면 젊은 세대는 이미 직선적 존재다. 그들의 삶은 구심력이 아니라, 관성과 속도, 자기 결정을 중시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원형사회에서 직선사회로 넘어가는 삼기점 위에 있다. 이를 읽지 못하면 갈등과 단절은 깊어지고, 읽어낸다면 사회는 새로운 균형을 찾게 될 것이다.
철학의 삼기점, 원에서 직선으로, 직선에서 흐름으로
삼기점은 철학사에서도 반복되는 구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회귀하는 원으로 이해했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목적을 가졌다. ‘뉴턴’은 이 세계를 직선의 법칙으로 재해석했다. “외부 힘이 없으면 직선 운동을 지속한다”는 그의 법칙은 근대철학 전체를 바꿨다.
그러나 현대철학은 이 대립을 넘어간다. ‘하이데거’는 운동을 물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드러남 방식’으로 봤다. ‘들뢰즈’는 세계를 고정된 원이나 단순 직선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형되는 ‘흐름’으로 봤다. ‘푸코’는 운동을 ‘권력의 재배치’로 봤고, ‘라투르’는 ‘네트워크의 재조립’으로 설명했다.
삼기점은 이처럼 원·직선·흐름의 세계가 교차하는 자리다. 세계는 원이라는 표면 아래에서 직선적 변화가 구조를 다시 만들어내고, 흐름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문명사의 삼기점, 역사철학이 말해온 전환의 반복
문명사는 원과 직선이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만들어왔다. 농경문명은 계절의 원을 따라 움직였고, 산업문명은 증가, 확장, 생산이라는 순환과 직선을 중심에 두었다. 20세기 중반 정보혁명은 또 하나의 직선적 돌파였다. 인간의 기억과 계산이 기술로 외부화되면서 문명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 한 번의 삼기점을 통과하는 중이다. AI·데이터·로봇·클라우드는 인간의 사고·감정·행동까지 흐름의 속도에 편입시키고 있다. 문명은 원→직선→흐름이라는 패턴을 반복하며 진화한다.
원형 문명은 안정적이나 변화에 취약하고, 직선 문명은 빠르지만 균형이 부족하며, 흐름 문명은 새로운 가능성이 많지만 예측하기 어렵다. 문명사의 삼기점은 바로 이 패턴이 재편되는 순간이며, 다음 궤도를 선택해야 하는 자리다.
삼기점 위에 놓여 있는 시대
세상은 언제나 삼기점을 넘어 새로운 궤도로 도약해왔다. 농경사회는 계절의 원으로 살았고, 산업사회는 기계의 회전으로 살아냈으며, 디지털 문명은 흐름과 속도의 직선적 질서를 만들어냈다. 이 전환들은 단절이 아니라, ‘형태의 변이’이며, 원에서 직선으로, 직선에서 흐름으로 이어지는 문명적 연속선 위에 있다.
지금 한국 사회도 정확히 이 삼기점 위에 놓여 있다. 정치에서는 국민의 직선이 낡은 원형 구조를 흔들고 있다. 경제에서는 속도와 연결이 기존 순환 시스템을 재편하고 있다. 사회에서는 직선적 삶이 원형 규범과 충돌하고 있다. 문명 전체에서도 흐름과 데이터가 기존의 원형·직선형 질서를 넘어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직선의 시대가 왔다’는 진단이 아니다. 삼기점 이후의 세계는 원·직선·흐름이 혼합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점이다. 원은 질서의 안정성을, 직선은 변화의 방향성을, 흐름은 가능성의 확장을 제공한다. 이 세 요소가 섞여 새로운 시대의 구조를 만든다.
삼기점 읽는 자가 시대 앞질러 미래 연다
‘들뢰즈’의 배치(assemblage), ‘하이데거’의 구성, ‘라투르’의 재조립된 사회가 바로 이런 구조를 설명한다. 오늘의 삼기점에서 중요한 주체는 읽는 자다. 원만 보는 자는 과거에 갇히고, 직선만 좇는 자는 방향을 잃고, 흐름만 강조하는 자는 뿌리를 잃는다.
그러나 삼기점을 읽는 자는 이 세 가지를 조화롭게 묶어 새로운 미래의 길을 열 수 있다.
45년 전 겨울 들판에서 깡통이 그렸던 원은 단순한 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 즉 겉은 원이지만, 그 원을 지탱하는 본질은 언제나 직선이라는 진실을 압축해 보여준 장면이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정치·경제·문명도 동일한 구조 속에 있다. 외형은 여전히 원을 말하고 있지만, 내면에서는 직선이 움직이며 다음 세계를 준비하고 있다.
삼기점을 읽는 개인은 인생의 궤도를 바꿀 수 있다. 삼기점을 읽는 조직은 낡은 구조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설계할 수 있다. 삼기점을 읽는 국가는 시대를 앞서가며 다음 문명을 향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삼기점을 읽는 자가 시대를 앞질러 가고, 미래는 결국 그런 자에게 먼저 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