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72)암흑 속 적막의 바다

  • 김영권 작가
2025.10.13 09:22:00 호수 1553호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형, 송장헤엄 칠 때처럼 드러누워 봐. 내가 한번 살펴볼게.”

피에로는 일단 물속으로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몸을 틀어 해면에 누웠다.

용운은 그의 다리 쪽으로 가서 살펴보았다.

눈에 띌 만큼 많은 피가 흐르는 건 아니었지만 벌어진 벌건 상처 속에서 가느다란 실 같은 핏기가 엿보이긴 했다.

피에로의 낙오


“형, 염려하지 마. 피는 안 나오니까, 가만히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평소처럼 채플린 흉내라도 내며 좀 웃어 봐.”

피에로는 짐짓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차가운 물 속에서 굳어 버린 얼굴 근육은 뜻대로 잘 움직이지 않았다. 둘은 파이팅을 외치곤 다시 출발했다.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바닷물 속에서 슬금 소용돌이가 칠 때마다 원한 맺혀 죽은 물귀신이 잡아끌 것만 같고, 어디선가 피냄새를 맡은 상어가 쫓아와 다리를 석둑 물어뜯을 듯해 공포스러웠다.

한동안 잘 가던 피에로가 또 멈춰 서서 얼굴을 찡그렸다.

“구름아, 다리가 굳어서 힘을 쓸 수가 없어. 아무래도 큰 탈이 생겼나 봐. 니가 걱정할까 싶어 기를 쓰고 따라왔지만…… 사실은 허벅지 쪽에 쥐가 나고 힘살이 끊어지는 듯이 계속 아파서 더 어쩔 수가 없어.”

그는 헐떡거리면서 겨우 말을 했다.

“형, 마음 단단히 먹어. 포기하면 안 되잖아. 힘겨운 고생 끝에 따 먹는 열매가 더 달콤하다고 형이 전에 말했잖아.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도 했지. 견뎌내자!”

하지만 피에로는 통증을 참느라 기진맥진해져서 팔에 힘을 넣어 헤엄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물살이 의외로 거세어서 멈춰 있더라도 계속 몸을 파닥거려야만 현상 유지가 가능했다. 피에로는 얼굴만 밖에 내 놓은 채 물속에서 팔을 조금씩 저으며 말했다.


“구름아, 너 혼자 가. 난 아무래도 안 되겠어…… 미안해.”

“정신 나간 소리 좀 하지 마! 마산포나 선감도나 이제 여기서는 비슷한 거리야. 죽든 살든,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차피 피장파장이란 말이야. 가다가 죽더라도 차라리 이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낫다구. 지난번에 기둥에 묶여 밤을 새운 기억을 떠올리면 뭘 못하겠어, 응? 죽자사자 가보자!”

“그래, 그래야겠지.”

피에로는 기운을 바짝 모아 외쳤다. 그는 전진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발을 쓰지 않고 팔만으로는 물살을 차고 나갈 수가 없었다.

용운이 다가가 도우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용운도 이제 자기 일신만을 겨우 지탱해 나갈 힘밖에 지니고 있지 못했다.

용운의 눈을 바라보던 피에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물속으로 쑥 가라앉더니 얼마 후 저 아래쪽에서 떠올랐다.

“형! 제발 힘내!”

“구름아, 잘 가!”

“형!”


“구름아, 넌 그래도 엄마를 찾을 희망이래도 있어 좋겠구나. 우리 엄만 날 낳다가 돌아가셨대. 어떤 분인지 도무지 상상하기도 막막해. 야, 잘가!”

피에로는 한쪽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러더니 또 쑥 물속으로 가라앉아 한참 후에 더욱 더 떨어진 거리에서 떠오르곤 했다.

맥이 빠져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고, 용운이 쫓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큰 탈이 생긴 피에로
아련하고 무정한 불빛

용운이 결정을 내릴 새도 없이 그는 거센 물살에 쓸려 저 멀리로 떠내려가 버렸다. 어둑한 새벽 바다 위에서 이제 그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형! 죽지 마! 살아야 해!”

용운이 소리쳤으나 아무런 대답도 들을 길이 없었다. 바다는 암흑의 적막 속에 잠겼다.

“형, 피에로 형…….”

용운은 울음과 짠물을 함께 삼키며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몸을 돌려 천천히 마산포 쪽으로 헤엄쳐 나갔다. 그의 입에서 흐느낌이 계속 흘러나왔다.

해풍이 불면서 물결이 더 거세게 몰아닥쳤다.

용운은 검푸른 바다 위에 등을 댄 채 둥둥 떠 있었다. 그는 거센 파도를 거슬러 오르느라 지친 나머지 곧 숨이 끊어질 듯 헐떡거렸다.

코끝을 스쳐 가는 바람에 염분기와 습기가 진해지더니 갑자기 컴컴한 하늘에서 천둥이 우르릉 쾅쾅 하고 쳤다.

음습한 해풍과 함께 귓가를 때리는 그 소리는 기진맥진한 용운에겐 추격자들의 총소리처럼 증폭되어 들렸다.

동료를 명중시킨 총알이 금방이라도 사방에서 몸을 꿰뚫고 들어올 듯해 용운은 공포에 질린 채 벌벌 떨었다.

천둥 소리와 더불어 번개가 번쩍번쩍하더니 뭔가 차갑기도 하고 뜨겁게도 느껴지는 이물질이 이마와 심장 속을 파고들었다.

이젠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용운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몸을 뒤집어 물속으로 잠수를 했다.

거대한 괴물 같은 바다. 물속의 억센 일렁임이 온몸을 비틀어 죈다.

숨이 가쁜 나머지 수면으로 눈을 살짝 내민 용운은 해면을 마구 두드리는 야릇한 소리를 들었고 그것이 거세게 내려치는 빗발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폭우는 강한 바람을 받아 비스듬히 내리며 용운의 얼굴을 두드려댔다.

통나무 같은 그의 몸은 거센 파도에 휩쓸려 멀리 환상처럼 깜박거리는 마산포의 한 점 흐린 불빛과는 반대 방향인 선감도 쪽으로 떠돌아 갔다.

이미 방향 감각을 상실한 상태였지만 용운은 본능적으로 그 아련한 듯하면서도 무정한 불빛을 쳐다보았다. 그 불빛은 빗줄기에 의해 산산조각으로 찢기고 있었다.

“엄마…… 박꽃 누나…… 피에로 형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그 소녀…….”

용운은 멍청이처럼 중얼거렸다. 오로라인 양 반짝이는 불빛의 파편 속에 환영이 어른거리는지도 몰랐다.

“왕거미 사감, 스라소니 놈, 그리고 그들의 손에 맞아 죽은 수많은 아이들…….”

용운은 울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입속에 자꾸 고이는 빗물을 뱉어내고 삼키며 뇌까렸다.

씹어뱉는 절규

“왕거미 놈은 말했었지. 너희 놈들이 억울하다고 지랄할 건 없다고.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 지려 하고, 이게 네놈들의 본성이라고. 그리고 전생에 얼마나 악독하게 살았으면 지금 이런 곳에서 이런 꼴로 썩고 있겠느냐고 말야.”

용운은 흐느끼면서 씹어뱉듯 절규를 토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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