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56)생각할수록 기구한 인생

  • 김영권 작가
2025.06.16 01:00:00 호수 1536호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라디오는 찐빵 같은 하얀 민얼굴로 변하더니 사라져 버렸다. 밤새 다른 악몽에도 시달리곤 했으나 눈을 뜨니 내용은 흐릿해졌다. 외부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고 음식물도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용운은 고무신에다 오줌을 받아 마셔야만 했다.

‘아,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용운은 괴로워하며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생각할수록 기구한 인생이었다.

암흑 속 공포


뒷산에서 두견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구슬펐지만 평소처럼 한맺힌 자신의 가슴을 긁어 올려 피를 토하는 듯한 소리는 아니었다.

어딘지 좀 겁에 질린 성싶은 어린 두견이의 울음이었다. 고향의 천왕산에서 울곤 하던 뻐꾸기 울음소리가 그리워, 하고 용운은 중얼거렸다.

문득 어떤 특별한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었다.

두견새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암흑 속에서 공포에 시달리고 또한 극도로 굶주린 나머지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였으므로 그게 환각인지 악몽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가수면 상태에 떨어져 있었다.

사람은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에야 생명에 대해 애착을 갖게 된다. 그 전엔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걸 인식시켜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답지 않게 점술 따위의 미신을 신봉하는 좀 별스런 양반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된 원인은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딸만 다섯을 내리 낳다가 겨우 아들을 얻었다. 아버지를 얻기 위한 할머니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겨웠다고 한다.

서낭당에서의 기도는 물론이고, 전국의 영험하다는 곳을 모두 찾아다니며 손이 발이 되게 빌어도 보았단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자 할머니는 어떤 신흥종교 단체에 들어가 맹렬히 기도하기 시작했단다.

“훔바리 훔바라 쿰…….” 하면서 온종일 미친 듯이 읊조렸다.


그 신령한 효험 덕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할머니는 그렇게 해서 아들을 얻게 되면서 자신의 신앙에 광적인 신념이 붙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 무슨 일이 생길라치면 먼저 회당을 찾았고, 손수 마당에 바가지를 엎고 칼을 꽂은 다음 끓는 물을 뿌리며 악귀를 쫓기도 했던 것이다.

“너는 아로아 천왕님이 내려주신 귀한 애란다. 암, 귀하구말구.”

늘 그런 소리를 들으며 자란 아버지고 보니 정상적인 생각을 지닐 수 없었던 모양이다. 늘 할머니의 손을 빌리다 보니 오줌을 눌 때도 제 손으로 바지를 내리지 못하고 징징 울었다고 한다.

밥도 떠먹여 줘야 했고, 연 날리기나 팽이치기 등 즐거운 놀이도 스스로 하진 못하고 할머니가 대신 해주는 것을 보며 바보처럼 히히 웃기만 했다는 것이었다.

훗날 할머니와 엄마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용운은 자신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용운은 고향의 푸른 하늘 아래서 황토 흙과 싱그러운 풀꽃의 향기를 맡으며 뛰어다녔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던 때였지만 그곳에서의 유년은 그런대로 행복한 편이었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어린애들이란 진종일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며 노는 게 전부였으니까.

아버지는 노름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밑천이 떨어지면 조상이 물려준 땅을 팔아 다시 노름판에 끼여 앉는 것이지만 그 돈 역시 며칠을 못 넘기고 날려 버리기 일쑤였다.


엄마의 얼굴엔 한시도 수심의 그림자가 걷힐 날이 없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 노릇이었다. 한데도 아버지의 노름은 변함이 없었다.

생명에 대한 애착
지나가던 노신사 말

변하기는커녕 그 일로 끝장을 보고 말겠다는 듯 아예 노름방에서 죽쳤다. 결국 생계비 걱정까지도 엄마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처음 구한 일자리는 삼 껍질을 벗기는 일이었다. 공터에다 삶은 삼나무를 쏟아놓으면 손으로 그 껍질을 벗기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병은 그 즈음부터 생겼다. 어느 날 아버지는 전에 없이 피곤한 기색을 하고 노름방에서 돌아왔다.

“그렇잖아도 힘이 드는데 한여름에 고뿔 감기가 뭐야! 미치겠군.”

아버지는 가래 끓는 소리로 뇌까리며 자리에 누웠다. 허풍스런 신음에 식은땀까지 흘렸다. 엄마가 약국에 가서 감기약을 지어 왔다. 하지만 증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 후엔 가슴이 아프다고 신음하더니 급기야 각혈을 했다.

“쯧쯧! 이 지경이 되도록…… 하기야 폐병이 몸을 속이고 여간 까다롭잖지.”

불러온 의원이 난처하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 보아 아버지의 병은 절망적이었다. 아버지는 부적을 받아오라고 명령했다.

엄마는 부적을 받아 와서 아버지의 베개 밑에 넣어 놓았다. 그러는 한편 엄마 나름대로 민간요법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뛰어다녔다.

우선 수난을 당한 건 뱀이었다. 뱀이 폐결핵에 특효라는 얘기를 들은 엄마는 날만 새면 자루와 막대기를 들고 산을 헤매었다.

절박감 때문일까, 어머니는 구렁이며 꽃뱀 따위를 적잖이 잡아들였고 그 뱀들은 곧바로 약탕관으로 들어가 꿈틀거리다가 죽었다.

그러나 수십 마리의 뱀을 먹고 부적을 썼음에도 아버지의 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신묘한 비약을 수소문하러 다녔다.

그런 어느 날 한 노신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깔끔한 양복 차림에 손엔 표지가 붉은 책을 들고 있었다. 그는 툇마루에 걸터앉으며 중얼거렸다.

“허! 맑고 밝은 하늘에 저 먹구름 한 점이 웬일인고?”

마당에서 약을 달이고 있던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보았다.

“동지섣달 센바람도 삼월 봄바람도 아무 효과가 없구나!”

엄마가 다급히 물었다.

“저, 어디서 오신 누구신가요?”

“허허, 어디서 온들 무슨 대수겠소. 그나저나 물이나 한 그릇 주면 고맙겠소이다만…….”

엄마는 부리나케 샘으로 달려가 생수 한 대접을 떠 왔다.

하늘의 계시

“음, 시원하군.”

“저, 좀전에 하신 말씀은 무슨…….”

“아, 그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하늘의 계시요.”

노신사는 그러면서 천천히 물 마시는 여유를 부렸다. 그때였다. 처음부터 듣고 있었는지 아버지가 갑자기 방문을 열고 해골만 남은 얼굴을 내밀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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