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경남 진주서 시작된 김장하의 침묵은, 서울의 법정서 역사적 선언이 돼 울려 퍼졌다. 누군가는 평생 말없이 주고, 누군가는 그 울림을 품고 사회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 그 울림을 가슴 깊이 새긴 제자 문형배가, 헌정사의 결정적 장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낭독했다.

2025년 4월4일 오전 11시22분, 대한민국 헌정사에 길이 남을 결정이 내려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서 헌법재판소는 파면을 명령했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판결문을 낭독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뒤에는, 그의 신념과 철학을 일궈낸 조용한 뿌리 같은 인물이 있었다.
문형배
꺼내다
바로 진주서 평생을 살아온 시민운동가이자 교육자, 기부자였던 김장하 선생이다. 최근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다시 조명되며, 그 이름이 회자되고 있다.
김장하 선생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진주 지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묵묵히 후원하는 어른’ ‘장학금을 주는 어른’ ‘기부는 해도 이름은 남기지 않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 존재가 전국적으로 조명을 받은 계기는 뜻밖의 순간에 찾아왔다.
그 단초는 다름 아닌 문형배의 입을 통해 처음 세상에 드러났다.
2019년 4월, 문형배 당시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가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돼 국회 인사청문회에 섰다. 청문회 도중 그는 자신의 성장 과정과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준 인물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주목받는 자리서 흔히 있을 수 있는 형식적인 답변일 수도 있었지만, 문형배는 “김장하 선생님이 계셨다”며 망설임 없이 한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증언은 청문회장을 순간 정적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그는 “나는 경남 하동의 농촌서 자랐고, 생활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진주서 한약방을 하시던 김장하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도와줬다”며 “장학금은 물론,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생활비까지 지원받았다. 단 한 번도 요구나 조건이 없었고, 그저 공부하라는 말뿐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관련 발언은 보도자료를 통해 세상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김장하’라는 이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문형배라는 인물이 보여준 법적 신념과 공공성의 뿌리에 김장하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이에 김장하 선생을 취재하려 한 기자들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는 인터뷰를 완강히 거부했고,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이런 김장하 선생이 세상 밖에 꺼내지면서 문형배와의 관계도 드러났다.
문형배와 김장하 선생의 관계는 오래됐다. 문형배는 1965년 경남 하동의 가난한 농부 집안서 태어났다. 3남1녀 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생활고에 시달렸고, 학교서 사용하는 교과서나 교복은 늘 물려받은 것이었다. 중학교를 간신히 마친 뒤 진주 대아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던 그는 우연히 김장하 선생의 눈에 띄게 된다.
김장하 선생은 당시 진주 동성동서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미 지역에서는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 어른’으로 알려졌지만, 누구에게 얼마를 줬는지, 어떻게 선발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일부러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학생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문형배 역시 처음에는 자신이 김장하 선생의 장학생인 줄조차 몰랐다고 한다. 학교 행정실을 통해 장학금이 들어오고 생활비가 지급됐으며, 특별한 조건 없이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단디해라” 무게 있는 격려
헌재 결정 이끈 ‘어른’ 그림자
그 지원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기숙사 생활비, 식비, 등록금까지 모두 포함된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그러나 김장하 선생은 단 한 번도 문형배에게 연락하거나 감사 인사를 요구하거나, 만남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조용히 옆에서 등을 받쳐 줄 뿐이었다.
문형배의 부친 문재열씨는 김장하 선생과 오랜 친구 사이였다. 두 사람은 진주서 함께 시민운동에 참여하며 평생을 우정을 나눴고, 가족처럼 지냈다. 문형배는 어린 시절부터 김장하 선생의 삶을 곁에서 지켜봤다.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약방으로 향하는 모습, 지역 단체 행사에 말없이 후원금을 전달하고 돌아서는 뒷모습,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하는 그 태도는 문형배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시간이 흘러 문형배는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처음으로 김장하 선생을 직접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하자, 김장하 선생은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던 것을 너에게 준 것뿐이다. 갚으려거든 나 아닌 이 사회에 갚으라”라고 말했다.

그 말은 문형배의 삶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는 훗날 부산고법 부장판사, 창원지법 부장판사, 부산가정법원장 등을 거치며 사법체계 안에서 ‘약자의 편’에 서려 노력했다. 2019년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돼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자리서 그는 주저 없이 김장하의 이름을 꺼내며 “김장하 선생은 저에게 자유를 기반으로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해 불합리한 차별을 줄이며, 박애로 공동체를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되고 심판 절차가 시작됐을 때, 문형배는 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으로 재판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사건의 엄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매 순간 공정함과 절제, 국민 앞에서의 책임을 되새겼다.
탄핵 심판이 결론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 그는 김장하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디해라” 그의 짧은 한 마디는 무게 있는 격려이자 조언이었다.
마니또
김선생
김장하 선생은 1944년 1월16일 경상남도 사천군 정동면 장산리 노천마을서 태어났다. 넉넉지 않은 농가서 성장한 그는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삼천포의 한약방서 점원으로 일했다. 낮에는 약을 썰고 밤에는 독학을 하며 삶을 버텼고, 열아홉살에 전국 최연소로 한약업사 자격을 취득했다.
1963년 사천군 용현면 석거리에 자신의 한약방을 열고 9년 뒤 진주 동성동으로 옮겼다. 1972년 진주 동성동으로 이전하여 ‘남성당한약방’을 개업했다. 이후 2022년까지 약 60년간 한 자리서 약방을 운영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이윤을 사용하지 않았다. 남성당한약방은 전국서 환자들이 새벽 기차를 타고 찾아올 만큼 유명한 약방이 됐고, 김장하 선생은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며 진주서 손꼽히는 고액 납세자로 기록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윤을 축적하지 않았다. 남성당서 벌어들인 돈은 고스란히 지역사회의 성장과 약자를 위한 지원에 쓰였다.
1983년, 그는 자신의 사재 100억원 이상을 들여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하고, 이듬해 진주 명신고등학교를 개교했다. 설립 자금만 100억원이 넘었고, 10년간 이사장을 맡으며 체육관, 도서관 등 모든 시설을 완비했다. 학교를 안정적으로 꾸려놓은 뒤인 1991년, 그는 학교와 인근 부지를 포함한 전 재산을 국가에 기부했다.
이 과정서 그는 명신고 이사장 퇴임사를 통해 “내가 배우지 못한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그 억울함을 후배들이 반복해서는 안 된다”며 “내가 번 돈은 세상의 병든 이들로부터 거둔 이윤이기에 내 자신을 위해 쓰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한다. 공립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게 된 이유”라며 이사장 퇴임사를 마쳤다.
김장하 선생은 교육 외에도 지역의 수많은 문화·사회·환경운동을 조용히 지원해 왔다. <진주신문> <진주가을문예>, 진주문고, 극단 현장, 진주여성민우회, 진주여성가정폭력피난센터,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진주오광대보존회 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삶을 꿰뚫는
명확한 철학
그는 1000명이 넘는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행사나 사진도 없었다. 단지 그 학생들이 잘 살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진주신문> 창간을 후원했을 때는 진주가을문예 문학상 제정을 위해 1억5000만원의 기금을 내놓기도 했다. 진주문고가 경영난으로 위기를 맞았을 땐 두 차례나 지원해 지역 서점의 명맥을 이었다. 진주여성민우회 창립과 진주여성가정폭력피난처 설립에도 힘을 보탰고,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진주오광대보존회 등도 그가 실질적으로 세운 단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론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고, 후원 사실을 알리는 일조차 극도로 삼갔다. 행사 사진도 찍지 않았으며, 어떤 후원자나 장학생에게도 자신의 뜻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이후 MBC 경남의 김현지 PD가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기획하면서 그의 삶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촬영을 거절당했고, 가까운 인물들조차 “선생님은 그런 걸 원하지 않으신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7년에 걸친 취재와 100명이 넘는 주변인의 증언, 오랜 시간 쌓인 기록들을 통해 김장하의 존재는 비로소 대중 앞에 드러나게 됐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김현지 PD는 “그는 자신이 카메라 앞에 서는 걸 원하지 않았고, 심지어 우리가 촬영하려 할 때 촬영 자체를 거절하셨다. 그분을 담는 데 2년이 넘게 걸렸다”고 말했다. 이런 김장하 선생을 오랫동안 취재해 만든 책 <줬으면 그만이지>의 저자 김주완 기자 역시 “7년 동안 인터뷰를 받지 않으셨고, 주변인을 100명 넘게 만나야 했다”며 “그는 기부란 그저 인간의 도리라는 말을 반복하실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삶을 꿰뚫는 철학은 명확하다. “돈은 똥과 같다. 모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세상에 뿌리면 거름이 된다”는 말처럼, 그는 벌어들인 자산을 모두 사회에 돌려줬다.
말년에 들어서도 검소한 생활
“나 아닌 사회에 갚으라” 지침
2000년 남성문화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과 시민단체 지원을 이어갔고, 2021년 재단이 해산되자 남은 기금 34억원과 서경방송 주식 2만주를 경상국립대학교에 기탁하며 마지막까지 환원을 실천했다.
그는 별도의 자택 없이 한약방 3층서 거주했다. 옷 한 벌도 몇 년씩 수선해 입으며, 소박한 삶을 당연하게 여겼다. 정치권의 선거자금 요청도, 상장이나 상훈도, 공직 제안도 모두 거절한 사람.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주장보다 실천으로 지역을 지탱했다.
김장하 선생은 말년에 들어서도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다. 자가용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해외여행이라고는 2005년 평양 방문이 유일했다. 6·25 전쟁 중 전사한 줄 알았던 친형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그 외의 어떤 관광이나 사치도 없었다.
전은정 진주문화연구소 소장은 “김장하 선생은 진주의 물리적 기반을 넘어 정신적 기반을 세운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진주서 시민운동, 문화예술, 인권운동이 지금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건 선생님의 조용한 뒷받침 덕분”이라고 말했다.
김장하 선생은 누구보다 교육을 중요시했지만, ‘성공’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어떤 장학생이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도 평범한 삶을 살고 있어 죄송하다”고 하자 그는 “세상을 지탱하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야. 너는 잘 살고 있는 거야”라고 답했다.
그는 늘 평범함을 지켜내는 사람들의 힘을 믿었고, 바로 그런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을 꿈꿨다.
그는 매번 정치권과 거리를 뒀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첫 민선 진주시장 선거서 김장하 선생을 후보로 추대하려 하자 그는 자리를 피했다. 상도 거절했고, 기자들과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숨은 후원자’ ‘익명의 어른’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후원받은 사람들조차 그가 누군지 모른 채 학업을 마치기도 했다.

문형배는 “재판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겸손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게 만든 이 사회를 기억하고 책임지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김장하 선생은 단지 한 사람의 장학금을 준 어른이 아니었다.
지역을 지탱하고, 공동체의 윤리를 전파한 어른이었고, 말없이 실천하는 가르침 그 자체였다.
김장하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를 ‘살아 있는 윤리책’ ‘ 현대의 선비’ ‘진짜 어른’ ‘사회복지법 그 자체’라고 불렀다. 김주완 기자는 “그는 정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취재 초기 7년간 인터뷰 한 번 받지 않았다”며 “그는 ‘돈은 나눠야 한다’고만 이야기했지, 그 이상의 미사여구는 없었다. 그런데도 지역 사회 전체가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김현지 PD는 그를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라고 표현했다. 그는 인터뷰서 “한 사람의 사적인 삶이,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이토록 넓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고 말했다. “카메라도 부담스러워하셔서, 핸드폰으로 촬영한 장면도 많다. 정말 그분은 다큐멘터리조차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이야기가 넘쳤다”고 전했다.
이 시대
진짜 어른
문형배의 한마디서 시작된 관심은, 결국 한 사람의 조용한 인생을 세상 밖으로 꺼내놨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빛나는 자리에 서지 않아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고 세상의 구조를 흔들 수 있다는 것.
그 증거가 바로 김장하 선생이었다. 2022년 한약방을 닫고 은퇴를 선언한 그는 가족들과 평범한 일상을 보냈고, 현재 그의 약방은 진주시와 지역 사회의 요청으로 ‘남성당교육관’으로 보존돼 올해 개관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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