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인문학> 뱃사람 놀이는 전국으로 퍼지고…

2023.05.30 08:36:43 호수 1429호

집안에서 부인이 저녁 식사가 준비됐다고 헨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회상에 잠겨 있던 헨리는 눈을 떴다. 저녁노을이 세인트앤드루스 바닷가의 반대쪽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헨리는 의자에 몸을 기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스에게 함께 가자는 손짓을 하며 두 사람은 집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는 저녁 메뉴가 올라 있었다. 감자와 옥수수, 약간의 양고기가 저녁 메뉴였다. 옥수수를 하나 집어든 헨리는 갑자기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찰스를 불현듯 바라보았다. 두 사람으로 인해 세인트앤드루스 바닷가에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골프 바람이 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놀이의 시작

그렇게 한평생을 골프 사랑으로 보낸 헨리와 찰스는 지난해부터 바닷가에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다. 지난해 주교가 골프를 쳤다고 군인들한테 잡혀가는 일이 발생하면서부터다. 그 주교는 골프를 친 죄로 감옥에 갇혔다. 전해인 1457년 스코틀랜드 왕이 ‘축구와 골프 금지령’을 내린 탓이었다.

헨리와 찰스는 동네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골프를 치는 모습을 앞으로는 평생 볼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두 해 전까지만 해도 해질 무렵 어부들은 만선의 노래를 부르며 바닷가에 배를 묶고는 골프채를 챙겨 나왔다.

그들은 모래사장에서부터 시작해 갈대 언덕을 넘어 들판을 지났고 토끼 굴까지를 목표로 해서 둥근 자갈돌을 몰고 다녔다. 귀갓길을 따라 만선의 어부들은 골프채를 휘두르면서 하루의 고생을 잠시 소일하는 것이었다.


세인트앤드루스의 바닷가에서 그 놀이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큰 파도를 피해 안쪽 깊숙히 만으로 들어온 에딘버러와는 달랐다. 세인트앤드루스는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나무도 제방도 없어 어부들은 늘 바람을 안고 살아야 했다. 게다가 모래사장과 모래웅덩이며 또 잡초까지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하루 고생 잠시 소일하는 행동
틈만 나면 돌을 때리던 사람들

천혜의 자연 조건은 사람들의 오기를 발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을 사람들은 틈만 나면 돌을 때려댔다. 어느새 놀이는 글래스고, 던디 등 인근 마을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사람들의 위안이 됐던 골프를 왕의 칙령이라는 이유로 이제는 칠 수 없게 된 사실에 헨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병사들이 훈련은 안 하고 골프만 즐긴다면서 제임스 2세가 내린 골프 금지령이 골프와 관련된 첫 기록이다.

식사를 마친 헨리는 벽장에서 뭔가를 꺼냈다. 조부가 만들어준 골프채였다. 두 손으로 겹쳐 쥐고 턱밑에 괸 채 그는 초점 없이 바닷가만 응시할 뿐이었다. 처음으로 골프채를 만들어준 할아버지는 예전에 돌아가셨지만 그 골프채는 지금도 헨리의 손에 들려있었다. 너무도 낡고 오래돼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이따금 꺼내 닦아주곤 했다.

할아버지는 헨리에게 골프와 비슷한 놀이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심어주었던 스승이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뱃사람으로 무역선을 타고 수십 년 동안 네덜란드, 스웨덴 등 동쪽 대륙의 나라들을 왕래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을 때 동네 아이들이 마당에서 비슷한 놀이를 했다고 말해주었다. 또한 네덜란드의 길었던 겨울에 그들은 심심치 않게 얼음판 위에서 공치기 놀이를 한다는 이야기도 옛날이야기처럼 해주었다.

골프를 막았던 왕정 분위기 
그래도 이어진 질긴 생명력

조부에 따르면 네덜란드 집 마당에선 주로 아이들이 편을 짜서 하고 있었고 아주 추운 날에는 집안에서도 막대기로 공을 때려서 문고리를 맞추곤 했다. 문고리를 맞고 떨어진 공의 거리를 재서 가장 근접한 공이 이기는 놀이였다. 어른들은 주로 성당의 뒷마당이나 넓은 뜰에서 정방형의 네모반듯한 선 안에서 목표물을 땅에 꽂아두고 맞추곤 했다.

빙판에서도 행해졌는데 역시 작은 목표물을 세워놓고 이를 맞추기도 했다. 빙판은 지면이 해수면보다 낮아 얼음판이 도처에 산재했던 네덜란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광경이었다. 할아버지가 태어나기 100년 전부터 네덜란드에는 이미 골프코스와 비슷한 필드가 존재했다.


그러나 마지막 마무리는 홀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었고 부엌, 성채, 법원 등지의 정문 따위가 목표물이었다. 교회 마당에서 장지에 이르기까지, 혹은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나 마을 모두 그들에겐 코스였다.

게임이 끝나면 진 팀이 이긴 팀에 맥주통을 줘야 했다. 그들에겐 막대기를 휘두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마을에서 유리창을 파손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사람들은 여름에는 마을에서 벗어난 농토나 들판에서 겨울에는 얼음판으로 장소를 바꿔 놀이를 하곤했다.

흔한 광경

그리고 무역선을 타고 왕래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헨리가 살고 있던 에딘버러에 정박하는 동안 해당 놀이를 이따금씩 했다고 조부는 헨리에게 일러주곤 했다. 헨리가 초원에서 목동들과 어울려 돌을 때리는 것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에딘버러에 와서 하던 놀이에는 물론 차이가 있었다.

상인들의 놀이는 편을 짜거나 혹은 기둥 같은 목표물을 세워놓고 좁은 공간에서도 놀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 헨리는 편을 짜지 않고도 혼자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놀이였다. 거리도 상인들의 그것에 비해 몇 배나 길게 해 토끼 굴로 최종 타깃을 만들어 놓았다. 몇 번이고 쳐서 양들이 밟아놓은 페어웨이를 거쳐야 했고 그렇게 해서 그린 위에 공이 올라간 뒤 굴 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webmaster@ilyosisa.co.kr>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