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대선주자 7인 현미경 검증 ②정치입문

2012.06.14 09:08:56 호수 0호

하늘이 점지한 나랏님은 누구?

[일요시사=서형숙 기자]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의 대선 주자들이 치열한 대권 레이스를 벌이고 있다. 상대를 이겨야 웃을 수 있는 치열한 레이스에서 최후에 웃게 될 자는 누가 될 것인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요시사>는 여(박근혜?김문수?정몽준)와 야(문재인?김두관?손학규) 6인과 비정치권 주자로 안철수 원장을 유력 대선주자로 선정해 검증하기로 했다. 앞서 출생과 성장과정을 살펴본데 이어 두 번째로 정치입문 과정과 배경을 들여다봤다.



흔히 ‘나랏님은 하늘이 점지한다’고 했다. 이는 대통령을 ‘하고 싶다고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져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민심이 곧 천심’임을 감안하면 대통령이 되기 위해 능력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 역시 중요하다. 때문에 잠룡들은 민심 속으로 파고들며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특히 자신이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인생스토리는 민심을 동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갖가지 다른 인생역정을 걸으며 대망을 향해 나아가는 잠룡들. 이들은 과연 어떤 연유로 정계에 첫발을 내딛게 됐을까.

<모락모락> 이회창과 비밀회동 후 달라진 박근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행했던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은 처음부터 정계에 발을 담갔던 것은 아니다. 박 전 위원장은 지난 1979년 10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되자 청와대를 떠나 재단운영에 전념했다. 그는 1980년 영남학원?1982년 육영재단?1994년에 정수장학회 등을 위임받아 운영한 것. 당시 박 전 위원장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정치적 발언은 삼가며 은둔생활을 했다.

하지만 각 재단마다 운영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영남대학은 전형적 사학비리가 터졌고, 육영재단은 운영권을 두고 혈육 간의 암투가 벌어졌다. 논란이 불거지자 박 전 위원장은 재단에서 전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재단의 비리전력은 후일 박 전 위원장의 아킬레스건으로 계속해서 따라붙게 됐다.


그러던 중 지난 1997년 대한민국의 초유의 사태인 IMF시대를 맞이했다. 이에 박 전 위원장은 “아버지가 일으켜 세운 나라가 IMF 사태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본격 정치권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정계 입문배경을 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것이 중론이다.

15대 대선 당시 TK(대구?경북)의 표심을 흔들 적임자로 박 전 위원장이 지목됐다. 이에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가 박 전 위원장을 포섭하기에 이른다. 1997년 12월2일 박 전 위원장과 이 후보는 비밀회동을 가졌다.

회동내용은 비밀에 부쳐졌지만 이듬해 2월 박 전 위원장이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달서군에 공천을 받으며 그 내용을 짐작케 했다. 그해 4월 박 전 위원장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본격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한나라당은 탄핵 역풍와 더불어 차떼기 사건이 불거지며 지지율이 유례없는 급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박 전 위원장이 당 대표로 추대되며 17대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한나라당은 원내 1당 자리는 내주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예상외의 선전을 하였다. 이때부터 박 전 위원장은 ‘선거의 여왕’으로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고 잠재적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

<무럭무럭> 2002월드컵 광풍 등에 업은 정몽준

‘7선 파워’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대학과 유학을 마치고 아버지가 창업한 기업에서 경영수업을 받으며 전형적인 재벌2세 코스를 밟았다. 그런 그가 정치권의 문을 두드린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아버지가 정 의원의 정치적 재능을 발견하고 권유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에 정 의원은 1984년 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 출마를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무소속 출마를 용납하지 않으며 정 의원은 유학길에 올랐다. 세계정세를 체득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정 의원은 13대 총선에서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사표를 던져  당선됐다. 그는 계속해서 울산에서 내리 5선에 성공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뚜렷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대한축구협회장과 피파(FIFA) 부회장으로 2002년 월드컵을 성공리에 마치면서 국민 여론조사에서 대선후보 1위로 치솟았다. 월드컵의 광풍을 업고 한순간 신드롬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 정 의원은 내친김에 국민통합21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정 의원은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후보단일화에 합의했다.

여론조사에서 패한 정 의원은 노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왔지만 대선 바로 전날 밤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갑작스레 철회했다. 이것은 그의 정치생명에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오점으로 남은 상태다. 

<기세등등> YS 손잡고 제도권 안착한 김문수


서민의 아들로 잡초처럼 자란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가로 활약해왔다. 80년대 이후 독재정권이 서서히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정착하면서 재야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이 자연스럽게 제도권 내로 진입할 때 김 지사도 정계에 발을 들였다.

1990년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과 함께 민중 중심의 좌파정당을 지향한 민중당을 만든 것. 여기서 김 지사는 민중당 구로갑지구당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민중당 노동위원장으로 선임되고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러던 중 김영삼 전 대통령의 눈에 띈 김 지사는 “혁명의 시대는 갔다”는 말을 남기고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이하 민자당)에 입당했다. 1994년 창당한 민자당은 이듬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신한국당으로 개명한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선거패배로 당을 쇄신하기 위해 구 민정당, 공화당계 인사를 몰아내고 이재오·김문수 등 민중운동, 노동운동 출신 인사들과 홍준표·맹형규 등 당시 스타급 신인정치인들을 영입한다. 김 지사도 이때 함께 영입됐다. 

지사는 이 신한국당 공천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부천시 소사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됐다. 이후 당이 김영삼 체제에서 이회창 체제로 바뀌고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꾼 뒤에도 계속 활동하였다.

<꿈틀꿈틀> 친노진영 대안론에서 대망론 꿰찬 문재인

‘노무현 그림자’ 문재인 민주통합당 의원은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변호사의 길을 걸어왔다. 문 고문은 사법시험 동기생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소개로 당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법무법인 부산에 합류했다. 이때 맺은 인연을 계기로 문 고문은 노 전 대통령과 30년 가량 가장 가까이에서 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앞서 노 전 대통령이 정계에 진입해 ‘청문회스타’가 된 뒤에도 문 고문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지난 2002년 6?13 부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노 전 대통령이 몇 차례 부산시장 출마를 권유했음에도 자신을 참모용에 빗대며 한사코 출마를 고사했다.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문 고문은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이후 그는 네팔 산행 도중 영자신문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달려와 변호인단을 꾸렸으며,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문 의원은 지난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장례절차에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으며 주목받았다. 특히 6?2 지방선거에서 유시민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낙선하자 친노진영에서는 유 전 대표의 ‘표의 확장성 한계’로 문 고문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의 저서 <문재인의 운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이어 ‘문사모’ ‘젠틀재인’ 등 팬카페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며 대망론까지 일었다. 한사코 정치를 거부하던 문 의원은 MB정권 심판과 정권교체를 위해 PK 공략을 진두지휘하겠다며 지난 4월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여기서 당선된 문 의원의 현실정치도 본격 시작됐다.

<차근차근> 이장?군수에서 장관?도지사 누빈 김두관

‘리틀 노무현’ 김두관 경남도지사는 민통련에 가입하고 간사 활동 중 개헌추진본부 충북지구 결성대회 주도 혐의로 구속됐다. 김 지사는 감옥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그는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낙향해 남해농민회를 조직하며 농민운동을 했다.

그는 고향 이어리에서 이장을 맡았고, 곧 <남해신문>을 창간해 직접 신문을 배달하며 마을 주민들과의 소통해 나갔다. 이 같은 행보는 이후 김 지사가 37세의 최연소로 남해군수 당선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는 1995년 초대 지방선거와 1998년 2대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남해군수에 당선된 것.

김 지사는 지난 2002년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권유로 고심 끝에 민주당에 입당해 경남도지사에 출마했다. 당초 무소속으로 도지사에 출마하려 했으나 노 후보의 끈질긴 설득 끝에 민주당에 입당했고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참여정부가 출범하며 이장 출신의 김 지사는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발탁되며 파격 인사로 관심을 끌었다.

이후 김 지사는 계속해서 PK지역에 출사표 내던졌지만 고배를 마셨다. 수차례 실패에도 결코 영남을 포기하지 않았던 노 전 대통령의 행보와 닮았다는 이유에서 사람들은 그를 '틀 노무현'로 부른다. 마침내 김 지사는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야권단일후보로 경남도지사에 출마해 당선됐다. PK경쟁력을 확보한 탓에 그는 여권의 강력한 경계를 받는 잠재적 대선후보로 분류되고 있다. 

<반짝반짝> 투사에서 교수까지…화려한 스펙 자랑 손학규

민주화 투사였던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크리스천 에이드’라는 교회단체의 장학금을 받아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손 고문은 귀국한 뒤 인하대?서강대에서 정치학 교수를 역임했다.

재야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손 고문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손 고문은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며 민자당에 입당하며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지난 14대 총선 보궐선거를 통하여 경기도 광명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YS 문민정부에서 최연소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됐다. 손 고문은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2002년에는 민선 3기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민주화 투사경험과 정치학 교수?3선 의원?장관?경기도지사까지 화려한 이력은 그를 차세대 지도자 반열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빅3로 꼽히던 손 고문은 전격적으로 탈당을 감행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탈당전력은 이후 손 고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며 오점으로 남은 상태다.

한나라당과 결별한 손 고문은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는 데 역할을 하였으나 대선후보 경선에서 당시 정동영 후보에게 석패했다. 하지만 손 고문은 2008년 1월에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로 선출된데 이어 지난 2010년 10월에도 민주당 대표로 선출되며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두근두근> 열렬한 국민적 지지로 떠오르는 안철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정치권 인사가 아니면서 정치권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인물이다. 난공불락 ‘박근혜 대세론’을 무너뜨린데 이어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정치권에 메가톤급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다.

안 원장은 그간 의사에서 프로그래머, 벤처사업가이자 대학교수로 활동하며 지속적인 변화와 끊임없는 노력을 거듭했다. 그는 1990년 최연소인 만27세에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을 역임했다. 의사생활을 하면서도 대한민국 최초의 백신프로그램인 V1, V2와 V3를 만들어 무료로 제작·배포해 명성을 쌓았다. 안 원장은 의대 학과장을 그만두고 1995년 2월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하여 아예 백신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스쿨에서 MBA를 취득한 뒤, KAIST 석좌교수로 임용됐다. 2011년에는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차세대융합기술원장을 맡았다.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정신을 겸비한 안 원장은 그간 지속적인 강연 ‘청춘콘서트’를 통해 젊은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희망을 심어주며 남다른 배려와 존중의 소통 방식으로 젊은 계층의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8월 윤여준 전 장관이 “안 원장이 서울시장 출마 가능성이 있다”고 언론에 알렸고 단숨에 지지율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안 원장은 2012년 대선 출마 여부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굳건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식지 않는 국민적 열망에 그의 대선 출사표가 언제 던져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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