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판 ‘11월 괴담’ 총력 추적

2011.11.04 15:35:00 호수 0호

11월에 떠난 기업총수 수두룩 ‘추도의 달’

[일요시사=송응철 기자] 연예계에서 11월은 ‘잔혹한 달’로 통한다. 이때만 되면 자살, 사망 등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11월 괴담’이라는 얘기가 회자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이에 따라 연예인들의 표정엔 올해 괴담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 11월 괴담은 비단 연예계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재계에도 11월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달에 유독 많은 기업 총수들이 세상을 떠난 게 바로 그 이유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맨땅에서 국내 1위 그룹’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은 1987년 11월19일 타계했다.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난 고 이병철 회장은 중동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다 1934년 중퇴했다.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세워 사업에 첫발을 들였으며,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19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을 하면서 1953∼1954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뒀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1961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 초대 회장에 선출됐다.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하면서 삼성그룹 육성의 발판을 만들었고 1974년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공업에 진출했다. 이후 용인자연농원·삼성정밀 등을 설립했으며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세웠다. 이 밖에도 문화재단·장학회 등을 설립했고, 백화점·호텔 등의 경영에도 참가, 사업의 다각화를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공헌했다.

#고 최종건 SK그룹 회장
‘5년만에 대기업 일으켜’

SK그룹의 창업자인 고 최종건 회장은 1973년 11월15일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수원 출신인 최종건 회장은 수원 신풍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나와 선경직물주식회사 수원공장 공무부 견습기사로 입사했다.

6·25전쟁 중 정부로부터 폐허가 되다시피한 공장을 매수해 낡은 직기 4대를 조립, 선경직물주식회사를 재건했다. 1953년 직기 4대로 출범한 이 회사는 불과 5년 만에 1000대의 직기를 보유한 대기업으로 발전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도 이 회사는 계속 성장, 1950년대 후반에는 한국 최초로 합성직물인 나일론, 데드론을 생산한 데 이어 1960년대 들어서는 크레폰·앙고라·깔깔이·스카이론 등 각종 직물을 개발해 국민의류생활 개선에 기여했다. 특히 1962년에는 한국 직물 사상 최초로 레이온 태피터를 홍콩에 수출하면서 우리 섬유산업 발전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선경이 오늘날 국내 유수 재벌기업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건 1966년부터다. 당시 선경화섬주식회사를 설립한 데 이어 1969년 9월에는 선경합섬주식회사를 설립, 아세테이트원사공장과 폴리에스테르원사공장을 건설했다. 또 섬유산업의 계열화를 위해 석유산업으로 사업을 넓혀 1973년 5월 선경유화주식회사를, 같은 해 7월에는 선경석유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수송보국·인재양성’

한진그룹 창업자인 고 조중훈 회장은 2002년 11월17일 영면에 들었다.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난 조중훈 회장은 15세때 부친의 사업실패로 정규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진해 선원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소 직공생활을 했다. 해방 뒤 조중훈 회장은 귀국해 트럭 한대로 인천 해안동에서 수송업체인 한진상사를 차렸다. 이후 57년 동안 오로지 수송보국의 일념으로 외길만을 걸어왔다.

조중훈 회장은 베트남 파병 당시인 1966년 베트남 군수품 수송사업에 뛰어들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이에 힘입어 한진관광, 동양화재, 대진해운등 많은 계열사들을 설립?인수하면서 재벌급 기업 반열에 들어섰다. 특히 1969년 정부의 강권과 내부의 강한 반대 속에서 인수한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세계적 민간항공사로 키우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 재계 9위의 든든한 지위를 확보하게 됐다.

조중훈 회장은 항상 국가 이익이 기업 이익에 우선한다는 생각에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소명의식과 자부심으로 국익을 위한 민간 외교 활동에 적극 나서 우리나라를 비롯해 프랑스, 독일, 벨기에, 몽골 등 각 국으로부터 수많은 공로 훈장을 받았다.

또 기업 경영에서 인재 양성을 최우선시했고 육영사업에도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인하대학교, 한국항공대학교의 인수는 물론, 평생교육, 평생직장 분위기 조성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사내대학을 개설하기도 했다.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
‘선친 뜻 이어 받아’

조중훈 회장의 삼남인 고 조수호 회장은 2006년 11월26일에 세상을 떠났다. 고 조수호 회장은 인천에서 태어나 1979년 미국 남가주대(USC)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졸업과 동시에 대한항공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1985년 한진해운 상무를 시작으로 한진해운과 인연을 맺은 조수호 회장은 1994년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2003년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한 이래 국내외 해운산업 발전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진해운이 세계적인 선사로 성장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수송보국’이라는 조중훈 회장의 뜻을 이어 눈앞의 이익보다 장기적인 성장을 목표로, 어려운 판단을 할 때 ‘공동의 이익’을 기준으로 삼아 온 것으로 전해진다. 조 회장은 이 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진해운이 연간 1억톤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는 국내 최대의 해운 기업이자 세계 7위권 규모의 선사로 성장시켰다.

인재양성과 육성사업을 중요시 한 선친의 뜻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1994년 제9대 한국해양소년단 연맹 총재에 선임되면서,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해양입국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1997년 2월부터 2000년 초까지 한국선주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해운관련 금융 및 세제, 국제선박등록제도 등의 합리적인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대형선사와 중소선사의 공존?공영의 기틀 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데 힘썼다.


#고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
한국 프로야구 반석에

고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은 2009년 11월4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6남1녀 중 2남으로 태어난 박용오 회장은 경기고등학교, 뉴욕 대학을 나와 1965년 두산산업에 입사했다.

이후 두산산업 사장과 동양맥주 사장, OB베어스 사장, 두산그룹 부회장, 두산산업 대표이사 회장 등을 거치며 착실히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마침내 지난 1996년 두산그룹 회장으로 취임해 2004년까지 8년8개월 동안 두산을 이끌었다.

박용오 회장은 재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왔다. 박 회장은 회장 취임 전인 1995년 당시 두산그룹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또 2000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전격 인수하는 등 공격경영의 기치를 올린 것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는 현재 두산그룹의 알짜 계열사로 성장했다.

대외활동도 활발히 했다. 한-이집트 경협위원장과 국제상공회의소 국내위원회 부회장을 지냈고 1998년 이후 만 7년간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총재를 역임하기도 했다. 금탑산업훈장, 스페인 민간공로훈장, 벨기에 왕실훈장, 한국능률협회 ‘2003년 한국의 경영자상’ 등 수많은 수상경력도 그의 경영능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2008년 성지건설을 인수했으나, 차남 박중원씨가 횡령 혐의로 구속되고 경영실적이 곤두박질치는 등의 이유로 큰 스트레스를 받아오다 집안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함으로써 향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 허영섭 녹십자그룹 회장
‘한국 의약품의 아버지’

고 허영섭 녹십자그룹 회장은 2009년 11월15일 작고했다. 한일시멘트의 창업주인 고 허채경 명예회장의 차남인 허영섭 회장은 1964년 서울대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독일 아헨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1970년 박사과정을 마쳤다. 같은 해 녹십자에 입사한 허영섭 회장은 1980년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1992년부터 대표이사 회장을 맡아 왔다. 같은 해 녹십자에 입사한 고인은 1980년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1992년부터 대표이사 회장을 맡아 왔다.

평생을 국내 필수의약품 분야를 개척해 수입에 의존하던 값비싼 의약품을 국산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과거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발한 B형 간염백신, 세계 최초로 개발한 유행성출혈열 백신,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한 수두백신 등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바이오 의약품 분야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사회공헌 활동도 빼놓지 않았다. 허 회장은 선천성 유전질환인 혈우병 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돕는 사회복지법인 ‘한국혈우재단’을 설립해 진료비 지원, 환자 조사 및 등록, 재활, 재단부설 병원 운영 등 지원사업을 펼쳐 왔다. 또 민간연구재단인 ‘목암생명공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국내 생명공학 연구기반 조성과 과학기술 발전에도 기여했다.

#고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
‘해운업계의 거목’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부친인 고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은 2006년 11월24일 명을 달리했다. 1948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현영원 회장은 1950년 한국은행에 입사해 5년간 도쿄지점 외국부에 근무했다.

현영원 회장은 이후 장인이 된 김용주 전방그룹 회장의 권유에 따라 1956년부터 신한제분과 근해상선의 전무로 자리를 옮겨 해운인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대한제철의 사장을 역임한 뒤 1964년 신한해운을 창업해 독자적으로 해운업체를 경영하게 됐다.

현영원 회장은 신한해운은 1984년 해운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현대상선에 합병될 때까지 해몽호, 해금호, 해정호, 해수호 등 7척의 선박과 203명의 임직원을 보유한 중견 해운업체로 키웠다. 그래서 ‘해운업계의 거목’ ‘영원한 해운인’으로 불렸다.

현영원 회장이 나중에 사돈이 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인연으로 1984년 현대상선 회장으로 활동하게 됐다. 해운 실무에 해박했던 현 회장은 1995년까지 회장직에 있으면서 오너 경영자인 당시 정몽헌 사장을 잘 이끌어 현대상선을 세계적인 해운업체로 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96년 현대그룹의 경영이 정몽구 회장-정몽헌 부회장 체제로 전환되면서 창업 1세대 경영인들이 대거 경영일선에서 퇴진할 때 현영원 회장도 현대상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대북사업에 전념할 때 조언자 역할을 해오다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고 전낙원 파라다이스그룹 회장
‘한국 카지노의 대부’

‘한국 카지노의 대부’ 전락원 전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은 2004년 11월3일 세상을 등졌다. 전락원 회장은 서울에서 태어나 1948년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 학업을 마치지 못하다가 1997년 명예졸업을 했다.

1950∼1960년대 중반까지 미군부대 군속으로 일하며 사업기반을 닦았다. 이후 오림포스 관광호텔 대표이사로 관광업계에 뛰어든 뒤 1973년 관광공사로부터 워커힐 카지노를 인수하며 국내 카지노 사업의 대표주자로 활약했다. 워커힐 카지노를 통해 막대한 부와 인맥을 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차례로 부산, 제주, 도고, 인천, 아프리카 케냐 등에 파라다이스 호텔을 설립하고 부산과 제주, 인천에도 카지노를 개장했다.

이후 면세점, 건설, 소방용스프링클러 제조, 미디어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며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부산, 파라다이스건설, 파라다이스미디어아트 등 11개 영리법인과 학교법인 계원학원 등 5개 비영리법인을 거느린 파라다이스 그룹을 일궈냈다.

1993년 외화밀반출 혐의로 옥고를 치렀으나 이후 기업의 사회공헌을 강조하여 2000년 국세청 모범납세인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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