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린터 데뷔’ 박태환

2011.08.02 08:56:35 호수 0호

‘멀리 가던’ 마린보이에서 ‘빨리 가는’ 마린가이로~

[일요시사=송응철 기자 ‘멀리 가던’ 마린보이가 ‘빨리 가는’ 마린가이로 진화했다. 박태환은 지난달 열린 상하이세계수영선수권 대회에서 ‘스프린터’로 데뷔식을 치렀다. 비록 남자 100m 준결승에서 결승행이 좌절되긴 했지만 스프린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자유형 400m 우승, 200m 4위, 100m 14위를 기록
400m서 최악의 1번 레인 배정…오히려 호재로 작용

‘마린보이’ 박태환이 상하이에서 열린 2011 국제수영연맹(FINA) 세계선수권대회를 모두 마쳤다. 이번 대회에서 박태환은 400m 우승, 200m 4위, 100m 14위를 기록했다. 가장 먼저 메달사냥에 나선 400m에선 선호하는 레인인 3번이나 6번을 배정받기 위해 컨디션을 조절하다 그만 준결승을 7위로 통과하면서 1번 레인을 배정받고 말았다. 1번이나 8번 레인은 수영장 벽면에 물살이 부딪치고 되돌아올 때 물의 저항을 받아 기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아주 불리한 곳이다.

400m 자유형
금메달 수확



생애 처음으로 1번 레인에서 경기를 하게 된 박태환은 오히려 초반부터 무서운 질주를 펼쳐 2위 쑨양(중국)을 1초차 이상으로 따돌리면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쑨양과 파울 비더만(독일) 등 선두권 선수들이 멀리 떨어진 박태환을 전혀 견제하지 못한 게 호재로 작용했다. 불리한 1번 레인을 받은 게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박태환은 400m에 이어 200m에서도 반란을 노렸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쳤다. 출발반응 속도는 가장 빨랐다. 초반 스피드를 내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박태환 초반 6위까지 쳐졌고 마지막 50m를 남긴 상황에서 장기인 막판 스퍼트로 4위까지 올라선 뒤 경기를 마쳤다. 1위와는 불과 0.48초 차이였다. 10m 정도만 더 남아있었더라면 충분히 역전에 성공해 메달권에 들어갈 가능성이 컸던 만큼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다.

마지막 100m는 박태환이 스프린터로서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경기였다. 박태환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00m에 처음 출전해 아시아 선수 중 유일하게 준결승까지 올라 아시아 최초 결승 진출을 노렸으나 조 6위, 전체 14위를 기록해 아쉽게 기회를 놓쳤다.

이번에도 출발반응속도는 빨랐다. 그러나 전문 스프린터가 아닌 박태환은 50m를 돌때 최하위까지 처졌고, 막판 스퍼트로 2명의 선수를 따라잡는 데 그쳤다. 이번 경기에서 박태환은 아쉬움이 남는 성적표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원래 중장거리 선수였던 박태환이 스프린터로 변신한 지 불과 6개월 지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특히 1년 앞으로 다가온 런던 올림픽에서 자유형 400m 2연패는 물론 자유형 200m에서도 세계 최강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에 충분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처럼 세계를 무대로 맹활약하고 있는 박태환이지만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는 숱한 좌절과 눈물이 있었다. 박태환이 처음 태극마크를 단 것은 중학교 3학년이던 2004 아테네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는 15세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찼다. 박태환은 자유형 400m 예선에서 긴장한 탓에 출발 부저가 미처 울리기도 전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헤엄도 쳐보지 못한 채 실격 당했다. 어린 박태환은 화장실 문을 잠그고 2시간 동안 서글픈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당시 흘린 눈물은 현재 세계 최고 수영선수가 되는 밑거름이 됐다. 눈물을 닦고 피땀을 흘려가며 연습에 매진한 박태환은 이듬해 4월 상하이에서 열린 쇼트코스(25m)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그리고 그해만 무려 8개의 한국 신기록을 쏟아냈다. 특히 2006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는 3관왕에 오르며 대회 MVP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가 ‘국민 남동생’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태환은 2007 멜버른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세계적인 선수로 급부상했다. 자유형 400m에서 세계 최고의 중장거리 스타인 그랜트 해켓(호주)을 누르고 금메달을 차지했으며, 200m에서는 ‘황제’ 마이클 펠프스(미국) 등에 이어 동메달을 따냈다.

당시 미국과 호주 언론은 앞다퉈 박태환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새로운 수영 영웅이 탄생했음을 알렸다. 당시 박태환의 나이는 불과 18세. 미처 성인이 되지도 않은 소년이 세계 수영계를 뒤흔든 것이다.

지금에 오기까지
숱한 눈물과 한숨

박태환의 거침없는 질주는 2008 베이징올림픽까지 이어졌다. 400m에서 한국수영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국민적 영웅이 됐다. 200m에서는 펠프스에 이어 은메달을 따냈다. 나중에는 펠프스와도 해볼만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불과 6개월 만에 스프린터 변신 성공 “기대된다”
런던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턴과 스타트 보완해야

항상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2009 로마세계선수권대회 400m, 200m, 1500m 세 종목에서 모두 결선진출에 실패하는 충격적인 부진을 겪기도 했다. 세계최고급 선수의 추락에 국민들과 언론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박태환 스스로도 은퇴를 생각할 정도였다. 선수생활의 가장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박태환은 딛고 일어났다. 박태환은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박태환은 남자 자유형 200m, 400m, 100m에서 금메달을 수확했다. 자유형 1500m에서도 은메달을 땄다. 2006도하아시안게임에 또다시 이어 3관왕에 등극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 이 대회를 통해 박태환은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가 가지고 있던 한국 수영 아시안게임 최다 금메달 기록(5개)도 갈아치웠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번 대회를 통해 스프린터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하지만 동시에 과제도 남겼다. 턴과 스타트가 바로 그것이다. 최대 목표로 삼고 있는 런던올림픽 금메달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출발 반응 속도는 빠르지만 잠영이 짧아 실질적으로 불리한 입장이라는 것이다. 박태환은 100m 예선을 마친 뒤 “내가 개선해야 할 것은 레이스 운영도 있지만 턴과 스타트 등이다”라고 말했다. “부족한 부분이 100이라고 하면 그 중 턴이 40%, 스타트는 60%”라는 구체적인 설명도 덧붙였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돌핀킥이다. 박태환은 마이클 볼(호주) 전담코치의 지도 아래 돌핀킥 기술을 집중 연마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잠영 거리가 평소 7∼8m에서 10m까지 늘어났다. 자유형 400m에서는 여유가 있어 연습한 성과가 나왔다. 하지만 자유형 200m와 100m에서는 조급함을 버리지 못하고 돌핀킥의 횟수가 1~2회에 그쳤다. 게다가 입수 후 너무 일찍 떠올라 경쟁자들에 비해 손해를 봤다. 이는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반드시 보완해야 할 과제다.

천식 앓던 약골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박태환은 어린 시절 천식을 앓던 약골 소년이었다. 수영을 시작한 것도 약한 몸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소년이 성장해 수영 불모지인 한국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성장했다. 선수 생활의 위기도 거뜬히 넘겼다. 오히려 한층 업그레이드 된 모습으로 돌아왔다. 시행착오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이번 대회 이후에도 박태환은 한단계 진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2012 로마올림픽이 간절히 기다려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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