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법조인 1호 물류학 박사’ 김천수 효성그룹 법무실장

2017.09.18 13:10:40 호수 1132호

한번 꽂히면 끝장…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법조인, 물류학 박사, 로스쿨 교수, 기업의 법무실장까지. 김천수 효성그룹 법무실장을 소개하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일생 동안 제대로 된 직업 하나 갖기도 어려운 시대에 김 실장은 또 다시 새로운 도전에 몸을 맡겼다. <일요시사>가 그의 족적을 따라가봤다.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효성그룹 본사서 김천수 법무실장을 만났다.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창가 한편을 빼곡히 메운 서류 더미. 김 실장의 개인 책상은 물론 회의용 대형 탁자에까지 A4용지 뭉치가 가득했다. 노타이 차림의 김 실장은 점심 먹다 옷에 뭐가 묻었다며 사진기자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방에는 라디오 방송의 클래식 음악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법조인이자
물류학 박사

“학교서 교수실을 배정받았는데 먼저 그 방을 썼던 분이 음악을 정말 좋아하셨나 봐요. 방음시설이 엄청 잘돼있더라고요. 그냥 썩히면 아깝다고 생각해 저도 음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만난 것처럼 김 실장의 도전은 우연한 계기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눈앞에 닥친 일에 어렵지 않게 순응하는 김 실장의 태도가 만든 변화였다. 그 덕에 법조인이자 물류인, 대학원 교수면서 기업의 법무실장을 맡는 등 인생의 생소한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다.

전주 해성고와 서울대 법대를 거쳐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그는 1992년 부산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법관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서울, 수원, 울산, 인천 등에서 판사로 재직했다.


그러다 2010년 2월 ‘물류 전문 변호사’라는 타이틀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2012년부터는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로 일했다. 6년간 학교에 몸담았던 그는 최근 효성그룹 법무실장으로 선임돼 기업에 들어갔다. 

법원과 변호사 사무실, 학교와 기업을 오간 숨 가쁜 25년이었다. 동시에 지난달에는 법조인 최초로 물류학 박사가 됐다.

김 실장이 물류를 처음 접한 건 연수 중이던 2000년 일본에서다. 도쿄 히토쓰바시 대학교의 이노베이션 센터라는 연구소에서 2주에 한 번씩 진행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게 계기가 됐다. 히토쓰바시 대학교의 전신인 도쿄 상업학교는 비즈니스맨, 이른바 실무가를 키우는 곳이다.

“지인이 법을 공부한 제게도 꽤 재미있을 거라면서 세미나 참석을 권유했어요. 교수들만 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계, 관계, 정계 사람들이 많이 보여 놀랐습니다.”

2000년 한국에선 벤처 붐이 크게 일었다. IT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때와도 맞물린다. 하지만 김 실장이 경험한 일본은 벤처나 IT 산업보다는 다른 일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상황이 궁금했던 그가 세미나 관계자에게 묻자 ‘온라인의 끝은 오프라인’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일본은 세계가 온라인에 완벽하게 물든 이후 오프라인 경쟁이 시작될 거라고 보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자신들은 그때를 준비하고 있다고, 그게 ‘물류’라고 하더군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온라인으로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물건을 받아보는 건 오프라인에서다. 

온라인 유통 공룡으로 불리는 아마존닷컴이 최근 오프라인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는 구조적 변화가 발 빠르게 일어나는 것도 그 증거다. 2000년대는 물론 현재까지 물류의 개념조차 자리 잡지 못한 한국으로선 상당히 뒤처져 있는 셈이다. 김 실장도 당시에는 물류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2000년 일본서 물류 처음 접해
2005년 공부 시작해 교수까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 실장이 본격적으로 물류학에 빠지게 된 것은 “친구를 잘못 만난 덕”이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는 하헌구 인하대 국제물류전문대학원 교수. 


하 교수는 2004년 글로벌 물류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설립된 인하대 아태물류학부를 만든 초기 멤버다. 김 실장은 하 교수의 권유에 따라 2005년 가을 물류 비즈니스 최고경영자과정을 수강하면서 물류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최고경영자과정을 마친 그는 같은 대학 물류 MBA 과정에 등록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박사 과정을 시작한 지 9년 만에 법조인 1호 물류학 박사라는 타이틀을 따냈다. 친구를 잘못 만나서 들어온 길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스스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영어 공부나 하라’며 살살 꼬드기는 친구 말에 넘어갔죠. 그런데 대학원서 첫 수업을 듣는데 ‘아, 이거 장난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힘들었어요.”

외국서 교수를 초빙해 진행한 수업은 4주 단위로 이뤄졌다. 2주간 30시간의 강의, 1주는 그룹 프레젠테이션, 마지막 주는 테스트로, 한 달이 지나면 한 과목이 끝나 있었다. 

2008년 판사로 재직 중이던 그는 판결문과 씨름하랴, 수업에 출석하랴 정신없는 한때를 보냈다. 게다가 국고를 지원 받았기 때문에 성적을 B+이상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상당했다.
 

30시간 강의 중 3분의 2가 넘는 시간을 세계지도와 함께 했다는 그는 ‘꿈에도 지도가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갖고 있던 물류에 대한 개념이 수업을 들으면서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그가 접한 물류는 단순히 물건을 주문하고 받아보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나아가 경제 흐름 그 자체였다.

예를 들어 왜 기업서 중국에 공장을 만드는지, 중국에 공장을 세우려면 정부와 어떤 협상을 해야 하는지, 공장부지 사용료는 어떻게 하면 보호받을 수 있는지 등 그가 만난 물류학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한국이 물류에 대한 기초 공사가 전혀 돼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각 대학에도 물류법 관련 전문가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친구 권유로 시작
9년 만에 박사학위


인하대 로스쿨 인가 과정서 역할을 한 하 교수의 러브콜이 또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는 교수로서였다. 법과 물류를 함께 공부한 사람이 생소하다 못해 없는 상황서 김 실장은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물류인이면서 법조인, 법조인이자 물류인이라는 독특한 조합의 경력은 그를 학교로 이끌었다. 

물류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물류 전문 변호사로 발을 디딘지 2년 만이었다.

“제가 국고, 국민 세금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걸 되돌려 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런데 대학원에 가봤더니 정말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하나씩 전부 만들어야 했어요.”

1950∼1960년대 물류를 바라보는 시각은 일본인이 번역한 그대로 ‘물적 유통’이었다. 그러다 1970∼1980년대 원료준비, 생산, 보관, 판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서 물적 유통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종합적 시스템을 뜻하는 로지스틱스라는 개념이 나왔다.

2005년에 이르러서야 소비자를 위한 기업 간 긴밀한 관계를 말하는 SCM(Supply Chain Management) 개념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경영상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게 불과 10년 남짓이니 제도적 기반을 세우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외국의 제도를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서로 다른 공동체의 특성상 어려웠다. 누구에게 주도권을 주고 법제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했다. 

기업과 기업의 관계를 시스템화하는 것이기에 누구를 중심으로 하느냐에 따라 많은 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한국서 물류법이 발달하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나눠 갖는 부분에 대한 법제화가 소극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부 차원서 ‘제발 좀 나눠 가져라, 상생해라’라고 상생협력법 같은 걸 만들지만 정책적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자발적으로 나눠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최근 프랜차이즈 기업을 둘러싸고 ‘갑질’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고 있다. 처음부터 가맹본부를 중심으로 모든 게 이뤄졌기 때문에 가맹점에겐 불리한 조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게 갑질이라는 형태로 분출된다는 것. 

하지만 가맹본부가 없다면 가맹점은 아이디어를 사용할 수 없고 가맹점이 없다면 가맹본부는 유지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지만 가맹본부와 가맹점은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관계다.
 

노동자와 자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기업에선 노동자를 비용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그들을 정리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한다. 사실 기업의 이런 방식의 일처리는 다른 기업에 대한 착취나 다름없다. 

생소한 개념
법제화 난항

노동자들은 기업에 고용돼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물건을 구매하는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계약의 개념 자체를 바꿔야 해요. 우리는 계약을 ‘대립하는 두 당사자의 의사표시의 합치’라고 합니다. 결국 한쪽이 손해를 보면 다른 한쪽은 이익을 얻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거죠.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가맹본부와 가맹점은 손해와 이익을 공유하죠. 서로 같은 방향을 보는 것도 계약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해요. 그래야 갑을 논쟁, 기업 구조 등에서 변화가 생길 거예요.”

개념도 생소한데 법제화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게 김 실장의 생각이었다. 물류를 둘러싼 제도적 기반을 법제화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효성그룹의 법무실장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 연장선이다.

한바탕 법률 전쟁을 치르고 있는 효성그룹은 최근 법무실장 자리를 상무서 부사장으로 높여 김 실장을 영입했다. 기업과 정부, 기업과 권력 간 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겐 좋은 기회였다. 그럼에도 그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며 언젠가는 학교로 돌아갈 것이라고 못박았다.

“저는 교수의 소명이 ‘빈둥거리기’라고 생각해요. 1년에 교수가 의무적으로 강의해야 하는 시간이 15시간입니다. 논문 한 ㄹ편, 학교서 요청하는 시험 감독이나 출제 등의 일이 교수가 한 해 동안 하는 일이죠.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교수의 신분을 보장해줘요. 왜 그럴까요?”

그는 교수 집단이 사회의 소금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수에게 부와 권력을 주지 않는 대신 시간과 명예를 준 이유를 곱씹어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2014년 4월 세월호 사고가 터졌을 무렵 심한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지, 실제 자신이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면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했을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세월호처럼 침몰하는 배인지, 방송서 흘러나오는 말이 우리를 죽이는 말인지 살리는 말인지 누군가는 판단하고 평가해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실장은 사회가 교수 집단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고 보고 있었다. 사회에 쓴소리를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직업군에 속해있다는 자부심과 고민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말을 나누는 내내 그는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어떤 판단을 했을까’라는 말을 거듭 반복했다. 판사로 재직하면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사이 체화된 습관인 듯 했다. 

‘나라면 어땠을까’ 고민의 습관
‘이번엔 무슨 공부’ 배움의 연속

그에게 ‘고민의 습관’을 준 건 부산지방법원에 갓 부임했을 당시 맡았던 사건이다. 1992년 부산에서는 총알택시를 타고 전국을 돌며 단독주택에 침입, 여자들을 강간하고 금품을 훔친 일당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부임 다음 날 이 재판에 들어가 결심 공판을 진행했다. 그리고 2주 후 6명의 범인 가운데 2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서울을 제외한 전국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자백한 것만 70여건이었다. 

그중 실제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진술한 건 36건이었다. 시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며느리를 강간하고, 딸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범하는 등 가해 일당이 저지른 몹쓸 짓의 수위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런 범죄자들 때문에 사형제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판사 일을 하면 할수록 그 사건이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똑같은 결론이 나오더라도 좀 더 고민해야 했다고 말입니다.”

이 사건은 2008년 그가 내린 국내 첫 존엄사 인정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인간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지에 대한 사건이었다. 

2008년 2월 병원서 폐암 조직검사를 받던 중 저산소증에 의한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된 김 할머니의 연명 치료 중단 여부는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첫 재판을 하자마자 ‘연명 치료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정한 김 실장은 실제 김 할머니를 만나본 이후 깊은 고민에 빠졌다.

“김 할머니를 뵙기 전에는 그 분이 이미 돌아가신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할머니 몸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눈도 깜빡이려고 하고 뭔가 전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의사들은 무의식적 반응이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제 눈에는 그분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때부터는 그분이 이 연명치료를 원할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죠.”

김 실장이 주범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사건과 김 할머니 사건은 그 결은 다르지만 판결에 의해 누군가의 생사가 좌우된다는 점에서는 같다. 
 

1992년 사건으로 죽음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갖게 된 그는 종교계를 포함, 주변 사람들에게 김 할머니 사건과 관련한 의견을 들으려 애썼다. 법리상으로 호흡기를 떼는 게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상황이었지만 김 할머니의 의사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김 할머니가 연명 치료 중단을 원할 거라고 답했어요. 아마 본인도 그 상황에 닥치면 호흡기를 떼 주길 바라기 때문인 거 같아요. 저도 그렇고요.”

2009년 5월 대법원은 김 할머니의 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김 실장은 김 할머니의 호흡기가 제거되는 날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1992년 주범 두 사람의 사형 집행 당시 그들을 찾아가보지 못한 마음의 빚도 일부 털어냈다.

후회 없는 삶
매일 즐겁게∼

“어린 시절 할아버지나 동네 어르신들을 보면 그 시절에 어떻게 살았는지, 뭐하고 살았는지 늘 묻고 싶었어요. 그들의 삶을 통해 제가 가야할 방향을 귀동냥 하고 싶었죠. 그런데 어느덧 제가 아들이나 손자에게 그 대답을 해줄 나이가 됐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야 그 애들이 열심히 살았다고 해줄지, ‘용서’해줄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것보다는 딱 한 발이라도 나가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전할 수 있다면 후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jsjang@ilyosisa.co.kr>

 

[김천수는?]

▲전주해성고, 서울대 법대(82학번)
▲사법연수원 제18기
▲부산, 울산, 수원 각 지법 판사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원(행정)
▲인천(형사), 서울서부지법(민사) 각 부장판사
▲일본 히토츠바시대학, 미국 버클리대학 각 장기연수
▲대법원 UNCITRAL 국제규범연구반(운송, 담보, 전자상거래) 반장
▲GLMP 2기, 인하대학교 물류MBA(MGLM) 1기, 물류박사 과정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효성그룹 법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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