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삼국비사 (28) 죽음

2017.04.10 10:13:55 호수 1109호

핏빛으로 물든 평양성

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당성과 명분 그리고 차후의 일을 고려해서 일단 참기로 했다.

아울러 자신은 자신대로 그리고 아내, 또 선도해와 연정토의 집사람으로 하여금 이리의 아내와 여타 귀족들의 부인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뇌물을 제공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아니 더 많은 재물을 요구함은 물론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이리의 속셈을 간파하고 간과 쓸개까지 내어주고 나서야 대대로의 직책을 받을 수 있었다.

융숭한 대접

이리의 집에 도착하자 이미 전갈을 받은 이리가 직접 연개소문을 맞이했다.


“허허, 대대로께서 직접 오시다니요.”

이리가 연개소문의 뒤를 따르는, 재물이 듬뿍 쌓인 마차를 바라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인께서 보여주신 노고에 비하면 미흡할 뿐입니다.”

말을 하며 연개소문이 가볍게 고개 숙였다.

“예서 이러지 말고 어서 정자로 오릅시다.”

연개소문이 소매를 잡아끄는 이리의 행동에 못이기는 체 따랐다.

정자에 다다르자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내 대대로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조촐하게 준비하였습니다. 어서 오르지요.”

“이거 참 송구합니다. 제가 대접해 드려야 하건만.”

“그런 말씀 마시고 어서 자리합시다.”


이리의 권유로 자리를 잡자 연개소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시는 게요, 대대로.”

“제가 대접해야 할 일이건만 대감께서 이리 대접해주시니. 그래서 방금 불현듯 떠오른 생각인데 제가 대감과 여러 귀족들에게 적게나마 성의를 표했으면 합니다.”

“모두에게 말입니까?”

“어차피 대감께서도 이 일을 이루시는 데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았을 터이니, 대감은 물론이고 그분들에게도 조촐하나마 대접해야 인간의 도리가 아닐는지요.”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여하튼 한잔 받으시지요.”

잔을 채우는 이리의 얼굴 위로 탐욕스런 기운이 스쳐지나갔다.

그를 감지한 연개소문이 더욱 공손한 자세로 이리의 잔을 채웠다.

“대감의 공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같이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여하튼 어떤 식으로 성의를 표하렵니까?”

“그야 대감께서 일을 성사시켜 주셨으니 그를 과시할 겸해서 자리를 마련함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잠시 말을 멈춘 연개소문이 두 손으로 잔을 들고 이리에게 마실 것을 종용했다.

이어 동시에 잔을 비워냈다.

“어떻게 말이오?”

“제 취임식을 거행하면서 모든 귀족들을 초대하는 겁니다. 물론 대감께서 상석에 앉으셔서 행사를 주관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허허, 그렇게 과분하게.”

“어차피 이 모든 일이 대감의 전폭적인 은혜로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이런 과분할 데가 있는가. 여하튼 대대로 직에 오른 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리오.”

“고맙습니다, 대감. 그리고.”

“말씀해 보시구려.”

“남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대감의 위신에 걸맞게 아주 특별히 예우하려 합니다.”

“어험!”

이리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헛기침을 해댔다.

“대감께 저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진귀한 보검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치고자 합니다. 아, 물론 모든 행사는 성 가까이서 행해질 것입니다. 어떠신지요?”

“진귀한 보검을, 성 가까이서요?”

“그래야 다른 귀족들의 수고로움도 덜어 드릴 수 있고 아울러 대감의 위상도 높아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야 좋은 생각입니다만, 성 가까이에서 행사한다면 왕께서 허락하실지 그게 의문입니다.”

“소신의 견해로는, 대감의 말씀이라면 왕도 쾌히 승낙하시리라 생각합니다만.”

탐욕에 눈 먼 이리…응징 노리는 연개소문
칼 빼든 연정토…동요하는 고구려 귀족들

연개소문의 치사에 이리가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내 한번 주선해보리다. 그런데 보검이라 하면.”

“제가 남들 보는 앞에서 대감의 은혜를 깊이 새기고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하시면 무방할 듯합니다.”

“그저 고맙게 생각할 뿐이오.”

빈 잔을 채우는 연개소문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평양성 남쪽이 북적거렸다.

열병에 참여하는 군사들과 음식과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분주했다.

한동안 시끌벅적하더니 약속된 시간이 되자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북소리에 맞추어 성문 앞에 임시로 설치된 단 위로 연개소문과 이리가 오르고 있었다.

마치 열병하고 있는 군사들이 포위하고 있는 듯한 단 아래 정중앙에 마련된 좌석에 귀족들이 앉아 있다 연개소문과 이리가 단 위에 오르는 내내 박수와 찬사를 보냈다.

“자리하시지요, 대감.”

단에 오르자마자 연개소문이 이리에게 중앙에 마련된 자리에 앉을 것을 종용했다.

“허허, 오늘의 주빈은 대대로 아니요. 어찌 내가.”

이리가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리며 자리를 잡는 순간 선도해가 단 위로 올라왔다.

단위에 올라선 선도해가 이리를 한번 힐끗 보더니 연개소문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단 앞 중앙으로 나섰다.

“오늘 이 뜻 깊은 자리에 참여해주신 모든 귀족 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동안 부친께서 유지했던 대대로의 직위를 정식으로 이어받아 취임식을 개최하는 연개소문 대인을 위한 자리입니다. 아울러 행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동안 연개소문 대인이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힘써주신 이리 대감에게 먼저 조그마한 선물을 증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선도해가 단 아래를 바라보자 연정토가 황금색 비단으로 싼 검을 들고 단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이어 중앙에 서 있는 연개소문에게 보검을 건넸다.

“대감, 나오시지요.”

선도해의 권유에 따라 이리가 거들먹거리며 중앙에 자리하자 앞에는 연개소문이 뒤에는 연정토가 자리 잡았다.

“본인이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성심성의를 다한 이리 대감에게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온 보검을 바치고자 합니다. 이 보검이 부디 우리 대 고구려의 번영을 위한 일에 쓰이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연개소문이 비단을 끌러내자 여느 검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자 이리의 미간이 살짝 찌그러졌다.

이어 연개소문이 천천히 검을 뽑아들자 칼날은 마치 톱처럼 군데군데 이빨이 빠져있고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이리의 비명

순간 이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단 앞에 있던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이리 뒤에 있던 연정토가 칼을 빼들고 손잡이 끝으로 이리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퍽 소리와 함께 이리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치면서 맥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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