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천외’ 교도소 탈출 백태

2016.10.10 14:09:18 호수 0호

도망가면 뭐하나 다 잡혔는데∼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영화 <쇼생크 탈출>의 백미는 주인공 앤디가 악명 높은 쇼생크 감옥을 탈출한 후 팔을 벌리고 비를 맞는 장면이다. 18년간 돌망치로 벽을 파낸 주인공의 집념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탈주범들은 경찰에게 붙잡히거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방식으로 탈주의 끝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감옥의 담을 넘으려는 탈주범들의 기상천외한 탈주 노력을 살펴봤다.



연쇄살인범 정두영이 탈옥을 시도하다 교도소 직원들에게 붙잡힌 사실이 알려졌다.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정씨는 8월초 교도소 작업장에서 몰래 만든 4m 높이의 사다리를 이용해 탈옥을 시도했다. 정씨는 사다리를 이용, 교도소 내 3곳의 담 중 2곳을 뛰어넘고 마지막 담을 넘는 과정서 발각됐다.

연쇄살인 정두영
사다리로 담 넘어

정씨는 지난 1999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부산과 경남 등지서 강도·살인 행각을 벌였다. 정씨는 철강회사 회장 등 9명을 둔기 등으로 잔혹하게 살해했다. 정씨는 검거된 이후 잔인한 살해 수법의 이유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내 안에 악마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답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

재소자의 교도소 탈주 시도는 잊을 만하면 한번씩 터져 나온다. 이들의 시도는 정씨의 사례처럼 탈주 과정서 발각되기도 하고, 희대의 탈주범 신창원처럼 탈주 성공 후 도주극을 벌인 경우도 있다. 경찰과 대치 끝에 탈주범의 자살로 마무리된 사례도 몇 차례 있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탈주극을 벌인 지강헌 사건도 그 중 하나다. 당시 지씨는 500만원을 훔친 죄로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 등 총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88년 10월8일 지씨를 포함한 12명의 미결수들은 교도소 이감 과정서 미리 준비한 흉기로 수갑을 풀고 호송버스를 탈취했다. 지씨의 탈주극은 인질극으로 이어졌다.

지씨 일행은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에 침입, 가족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던 중 2명이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 지씨는 유리조각으로 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경찰이 쏜 총을 맞고 과다출혈로 숨졌다.

탈주범의 자살로 탈주극의 전말이 온통 베일에 가려진 사건도 있다. 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박봉선은 역시 살인 혐의로 징역 15년을 받은 신광재, 폭력 초범이었던 김모군과 함께 탈옥을 도모했다. 감옥 쇠창살을 자르고 교도소 담벼락을 넘는 등 세 사람의 탈주 방식은 대범했다.

실사판 쇼생크 탈출? 현실은 달라
탈주범들 대부분 한 달 내 붙잡혀

1990년 12월27일 이들은 감방 창문에 설치된 철책 2개를 쇠톱으로 자르고 사물함으로 쓰던 선반으로 사다리를 만들어 4.5m 높이의 교도소 담을 넘었다. 세 사람의 행각은 이틀 만에 경찰의 감시망에 걸렸다.

박씨와 신씨는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탈주 당시 경찰에게 빼앗은 총으로 자살했다. 공범이었던 김모군은 경찰에 연행됐으나 단순 공범 수준이어서 아는 바가 없었다. 두 사람의 자살로 직경 2㎝의 쇠창살이 어떻게 잘렸는지, 어떻게 수시로 복도를 오가는 교도관의 눈을 피했는지 등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았다.

무기수로 수감 중이던 재소자가 귀휴제도를 통해 교도소 밖으로 나갔다가 잠적 후 자살한 사례도 있었다.강도·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홍승만은 2015년 4월 귀휴 허가를 받고 나갔다가 연락이 끊겼다.

1962년부터 시행된 귀휴제도는 6개월 이상 복역한 수형자가 형기의 3분의 1이 지나고 교정성적이 우수하면 1년 중 20일 내로 귀휴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제도다. 홍씨가 잠적 8일 만에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면서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대도’ 조세형 탈주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전문털이범이었던 조씨는 부유층과 권력층 집만 골라 털어 대도라는 별명이 붙었다. 조씨의 범행은 피해 사실을 극구 숨기려 드는 피해자들의 행태로 더욱 유명세를 탔다.

1982년 검거된 조씨는 1983년 결심 공판날 구치소로 돌아가기 전 구치감 문을 부수고 복도로 나와 환풍기를 뜯고 탈주했다. 조씨는 탈주 후 다섯 차례나 주택에 몰래 침입해 음식, 현금, 옷가지 등을 훔쳤다. 조씨의 도주극은 장충동 주택가서 그를 발견한 한 청년의 신고로 5일 만에 막을 내렸다.


관련 경찰들
여럿 옷벗어

법원서 탈주를 시도한 일도 발생했다. 2000년 1월 특수강도죄로 14년을 복역한 정필호는 호송버스서 재소자 두 사람을 만나 탈주 계획을 전했다. 정씨는 감방 내 방범창틀을 잘라낸 뒤 화장실 시멘트 바닥에 갈아 날카롭게 만들었다.

정씨는 2차 재판기일이었던 2000년 2월24일 춥다는 핑계로 평소보다 훨씬 많은 옷을 껴입고 흉기를 허리춤에 감췄다. 이후 정씨는 광주지법서 교도관이 수갑을 풀어주자 그 틈을 타 흉기로 교도관을 찌르고 도주했다. 낮에는 서울 지역 야산서 은신하고, 밤에는 도심 부근에 내려와 도피 행각을 벌이던 정씨는 탈주 13일 만에 경찰과 격투 끝에 검거됐다.
 

유치장서 온몸에 연고를 바르고 배식구를 통해 탈주한 사례도 있었다. 2012년 9월 강도·상해 피의자였던 최갑복은 대구동부경찰서 유치장서 경찰이 졸고 있는 틈을 타 탈주했다. 최씨는 연고를 발라 몸을 매끄럽게 만든 뒤 가로 45㎝, 세로 15㎝ 유치장 배식구를 빠져나가 대중을 경악케 했다.

신창원·이낙성 희대의 탈옥
경찰과 대치 자살로 끝내기도

최씨가 배식구를 빠져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30여초 남짓. 이후 그는 2m 높이의 창문에 매달려 창살 사이를 벌리고 1분 만에 도망쳤다. 최씨의 탈주 행각은 미국 CNN이 뽑은 ‘희대의 탈옥 사건’으로 뽑힐 정도로 기상천외했다.

최씨는 탈주 직전 3번에 걸쳐 예행연습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의 탈주 당시 근무 중이던 경찰관들은 근무소홀 등의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최씨는 1990년 7월에도 경찰 호송버스 뒤쪽 쇠창살을 뜯고 탈주했다가 이틀 만에 검거된 바 있다.

대부분 재소자들의 탈주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짧게 끝나는 것에 반해 탈주 후 1년6개월 이상 도주해 경찰을 놀라게 한 탈주범들도 있다.

신창원은 1997년 1월 부산교도소를 탈옥한 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경찰을 농락해 ‘희대의 탈주범’으로 불린다. 절도 등으로 소년원과 교도소를 들락거리던 신씨는 1989년 3월 공범과 함께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한 가정집에 침입, 집주인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6개월간 수배생활 끝에 같은 해 9월 검거된 신씨는 강도치사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탈주 당시 신씨는 1994년 부산교도소로 이감돼 복역 중이었다. 신씨는 노역작업 중 손에 넣은 작은 실톱날 조각으로 4개월에 걸쳐 화장실 쇠창살을 잘라냈다. 당시 부산교도소는 교회 공사를 위해 교도소 외벽 일부가 철거되고 철제 울타리로 대체된 상태였다.

관리는 허술
제보 결정적

신씨의 탈주는 감방 동료 사전 포섭설, 교도소 묵인설이 제기될 정도로 신출귀몰했다. 신씨는 부산교도소에서 오랜 시간 모범수로 지내고, 15㎏ 이상 감량하는 등 탈주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씨가 외부환기통을 타고 공사장서 주운 밧줄을 이용해 공사장 담을 넘어 교도소를 빠져나가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30분 정도였다. 교도소 탈주에 성공한 신씨는 화훼농가에 침입, 옷을 훔쳐 입고 택시를 타고 서울로 잠입했다. 2년6개월에 걸친 도주극의 시작이었다.

신씨는 도주 기간 동안 여러 차례 경찰과 맞닥뜨렸지만 유유히 따돌려 ‘다람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그는 경찰이 쏜 가스총을 맞고도 도주한 적이 있으며, 그 과정서 빌라 5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대담성을 보이기도 했다.
 

신씨의 변호사였던 엄상익 변호사는 <신창원 907일의 고백>이라는 책을 통해 그의 탈옥, 검거 순간, 도주 당시 행적 등의 얘기를 담았다. 책에는 신씨가 도주 과정서 다방 종업원, 주유소 종업원 등 15명의 여자들과 동거했으며 절도 행각으로 생활비를 마련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화제를 모았다.

신씨의 도주 행각은 집에 방문한 가스수리공 이모씨의 눈썰미 덕분에 막을 내렸다. 이씨는 한 아파트에 가스레인지 수리를 하러 갔다가 신씨로 보이는 남자를 발견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이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1999년 7월 신씨를 검거하면서 그의 도주극은 끝을 맺었다.

신씨가 검거 당시 입고 있던 화려한 티셔츠가 큰 관심을 받는 등 그는 도주극 내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신씨는 검거 이후 무기징역 외에 22년3개월의 형을 추가로 언도받고 복역 중이다.

보호감호 도중 치핵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탈출해 1년7개월 만에 검거된 이낙성 역시 경찰에게는 악명 높은 탈주범이다. 이씨는 1986년 절도 혐의로 처음 체포된 후 1988년 강도·상해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2001년 강도 혐의로 또 다시 체포돼 징역 3년에 보호 감호 7년을 선고받았다.

2004년 1월부터 청송감호소서 보호 감호를 받던 이씨는 2005년 4월 경북 안동시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주했다. 이후 그는 지하철 2호선 사당역 근처에 내린 후 종적을 감췄다.

이씨가 1년7개월간 자취를 감춘 사이 청송보호소 보안과장이 직위 해제됐고, 이씨의 탈주에 협조한 친구 염모씨가 구속됐다. 또 극히 열악한 수용환경과 이중처벌 논란이 있었던 청송보호감호소가 폐쇄되기도 했다.

경찰은 2005년 6월 전국 10개 경찰서에 이낙성 수사 전담반을 추가 편성했다. 그 이후에도 4개월 이상 도피행각을 벌인 이씨는 같은 해 10월 서울 영동병원에서 체포됐다. 이씨는 검거 당시 윗니 몇 개가 완전히 빠졌고 아랫입술, 턱 등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이씨는 ‘정종철’이라는 가짜 이름을 대는 등 신원을 밝히지 않고 있다가 도주했다. 병원 관계자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근처 은행 지점 앞에서 이씨를 체포했다.

목숨 건 도주
허무하게 막 내려

사망설, 중국 밀항설 등 갖가지 소문이 돌 정도로 철저히 숨어있던 이씨의 도주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이씨는 도주 기간 동안 인력시장을 찾아가 중국집 등에서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검거 이후 “도주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최장기 탈옥수' 신창원은 지금?

‘최장기 탈옥수’신창원의 근황이 화제다. 탈주범들은 대부분 탈주 후 한 달 이내에 경찰에 검거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와 비교하면 신씨의 2년6개월간 도주 행각은 기함할 수준. 신씨가 도주 기간 동안 움직인 거리는 4만㎞에 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4만㎞는 서울과 부산을 약 50회 왕복한 만큼의 거리다.

그의 탈옥으로 수많은 경찰들이 옷을 벗었다. 경찰은 신씨를 검거하기 위해 헬리콥터를 띄우고 전경을 동원하는 등 총력을 다했으나 번번히 눈앞에서 놓치면서 망신살을 샀다.

신씨가 부산교도소를 탈주했던 1997년부터 가스수리공의 제보로 1999년 검거되기까지 전국이 들썩일 정도로 그에 대한 관심이 컸다. 신씨가 체포 당시 입고 있던 화려한 빛깔의 티셔츠가 대중 사이에서 유행할 정도였다.

신씨는 재검거 된 후 항소심에서 22년6개월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그는 교도소에서 모범적으로 생활하며 지난 2004년에는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하기도 했다. 이전까지 신씨의 학력은 중학교 중퇴였다.

신씨는 국가와 교도소장 등을 상대로 4건의 소송을 제기한 적도 있다. 당시 모든 소장을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놀라움을 자아냈다.

2009년 신씨는 자신이 작성한 편지 12통의 발송이 불허되자 교도소장을 상대로 서신발송 불허처분 취소와 300만원의 손해배상금 지급을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보다 앞서 신씨는 교도소 내 수용자 인성교육의 문제점을 담은 신문기고용 서신 발송이 불허되고 외부 서신 2통을 받지 못한 데 대해 정보비공개 처분취소와 손해배상금 150만원을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두 건의 행정소송은 신씨가 취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 취하의 이유는 뚜렷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는 승소를 하기도 했다. 신씨는 “교도소에서 기자 접견을 막고 편지를 외부로 보내주지 않아 피해를 봤다”며 2008년 국가를 상대로 300만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은 대법원까지 갔다. 1·2심 재판부는 신씨의 정신적 고통을 인정해 일부 승소 판결했고, 대법원은 “소액사건에서는 원심 판결이 대법원 판례에 위배될 때 상고할 수 있는데 원심이 대법원 판례에 상반되는 판단을 했다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들어 100만원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이와 별개로 신씨가 수감생활 중 디스크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도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1·2심 재판부의 판결이 있었다.

국가 등을 상대로 한 소송으로 세간을 깜짝 놀라게 한 신씨는 2011년 11월 독방에서 자살을 기도해 또 한 번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다. 신씨는 11월18일 새벽 4시10분경 교도소 독방에서 고무장갑으로 목을 졸라 자살을 기도했다. 당시 신씨가 머물던 독방에서는 ‘죄송합니다’라는 글이 발견되기도 했다. 정확한 자살 기도 원인은 공개된 바 없지만 부친의 사망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한동안 조용하던 신씨의 근황은 뜻밖에도 이해인 수녀를 통해 전해졌다. 이해인 수녀는 지난 4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신씨와 연락하며 지낸다고 말했다. 이해인 수녀는 “(신씨가) 시의 매력에 빠져있다더라.다섯 편을 쓰면 제게 보내겠다고 해서 격려해줬다”고 전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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