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뒤 숨은 고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2010.11.30 10:57:03 호수 0호

승자의 ‘영광’은 내가, ‘저주는 계열사에 나눠드려요~

“살림만 하던 여자가 할 수 있겠냐” 부정적 인식
숙부의 난, 대북사업 제동 등 가시밭길 펼쳐져


지난 2003년 10월 남성일색이던 재계에 한 여인이 등장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바로 그녀.

27년 살림꾼에서 재계 총수 자리에 오른 현 회장은 남편으로부터 지휘봉을 넘겨받아 현대그룹을 진두지휘해 나갔다.

이 가운데 최근 M&A시장에 현대건설이 매물로 올라왔다. 현 회장으로선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회사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경영권을 위해 반드시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절박함이 묻어난 ‘풀베팅’으로 현 회장은 결국 현대건설을 손에 넣었다.

현대그룹은 축배를 들었지만 아직 이르다는 지적이다. 넘어야 할 산이 많기 때문이다. 2003년 8월4일, 현대그룹 비서실로부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연락이 왔다.

남편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자살했다는 것. 이 전화 한통으로 현 회장은 21세에 현대가로 시집온 지 27년 만에 국내를 대표하는 그룹의 총수로 오르게 됐다.

27년 살림하다
그룹 총수 올라



남편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남편 사후 100일도 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10월21일 현대그룹 3대 회장에 취임한 것. ‘현대가의 며느리’들이 대외활동을 삼가는 게 보통인데 비해 매우 파격적인 행보였다. 이에 따라 현 회장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세 자녀를 거느린 어머니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수만명의 그룹 임직원과 그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위치에 올랐기 때문이다.

현 회장이 처음 총수의 자리에 오를 당시, 주변의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평생을 살림만 해오던 여자가 그룹의 총수로서 제몫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고 정 회장의 타계와 동시에 이른바 ‘숙부의 난’이 불거져 나왔다. 2003년 8월 정상영 KCC 명예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매입하면서 현대그룹 경영에 간섭하기 시작한 것.
 
KCC와 현대그룹간의 경영권 분쟁은 이듬해 3월 현대엘리베이터 주주총회에서 현 회장이 승리할 때까지 8개월간 지속되면서 현 회장을 끈질기게 괴롭혔다.비록 사태는 일단락 됐지만 KCC는 아직 현대그룹 주력계열사인 현대상선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비록 경영권을 위협할 정도의 지분은 아니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는 셈이다.

이후에도 현 회장의 앞에는 가시밭길이 펼쳐졌다. 그룹의 가장 큰 사업 중의 하나인 대북사업에 제동이 걸린 것.

현대그룹의 대북 관광사업은 1998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방북과 ‘금강호’ 출항과 함께 시작됐다. 그러나 2008년 7월 금강산해수욕장에서 남측 관광객이 북한 군인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중단됐다.

하지만 현 회장이 항상 강조한 것처럼 대북사업을 접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 한명이 북측 관광지를 찾더라도 대북 사업을 할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여러 차례 내비쳤다.

또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남편 고 정몽헌 회장의 숙원사업일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에서도 대북사업은 중요 통일 정책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정체상태다. 문제는 대북사업이 언제 재개될지 기약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시동생과 벌였던 경영권 분쟁, 아산직원 억류 등 굵직굵직한 사건·사고들이 터져 나오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현 회장의 지휘아래 점차 성장해 나갔다. 이 가운데 현대건설이 M&A시장에 매물로 등장했다. 현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수의지를 불태웠다.

현 회장은 현대건설이 외환위기와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2001년 그룹 계열에서 떨어져 나간 뒤 줄곧 눈독을 들여왔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회사이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현 회장은 그룹의 모태이자 상징인 현대건설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다짐해왔다.

무엇보다 경영권을 위해 현 회장에게 현대건설은 절실했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전 결과에 따라 경영권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그룹 주력사인 현대상선의 지분 8.3%를 보유하고 있어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라도 기필코 ‘먹어야’하는 처지다.


현대상선은 현대중공업이 17.6%를, 현대중공업의 자회사인 현대삼호중공업이 7.9%를, KCC가 4.9%를 소유하고 있다. 만약 범현대가가 현대건설을 삼킬 경우 현대그룹으로선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로지엠→현대엘리베이터’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다. 한때 재계에서는 현대차와 현대그룹이 현대건설과 현대상선 지분을 맞교환하는 ‘빅딜’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현대그룹은 경영권을 지키고 현대차는 현대건설 인수를 통해 덩치를 키우는 윈·윈 전략이다.

그러나 현대차 내부에서 “현대건설을 인수하더라도 현대상선 지분을 현대그룹에 넘겨줄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현 회장이 인수 강행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현대건설 인수과정은 험난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대북사업이 전면 중단된 데다 올 초부터 현대상선이 재무구조개선 약정 대상으로 선정돼 유동성 압박을 받았다.

다윗 돌팔매
골리앗에 적중

설상가상으로 재계 순위 2위인 현대차가 인수전에 뛰어들면서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는 ‘물 건너갔다’는 얘기가 나왔다.
우선 현금성 유동성만 10조원이 넘는 현대차의 자금력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될 정도였다. 막판엔 전략적 투자자로 유치하려던 독일 회사와의 컨소시엄이 무산되면서 벼랑 끝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동양종금증권과 프랑스 2위 은행인 나티시스은행을 재무적 투자자(FI)로 끌어들이면서 ‘반전’을 꾀했다.
당초 관련 시장에서 예상한 현대건설의 인수가는 최대 4조원을 웃도는 액수였다. 하지만 지난 16일 현대그룹이 제시한 액수는 5조5000억원이었다. 5조1000억원을 써낸 현대차그룹에 비해 무려 4000억원이나 높은 가격이었다.

이는 현대그룹이 우선협상대상으로 선정된 결정타가 됐다. 다윗의 돌팔매가 골리앗의 미간에 적중한 것. 이로써 현대그룹은 일단 현대상선을 둘러싼 범 현대가와의 지분 경쟁에서 한시름 놓게 됐다.
기존 현정은 회장 등 우호 지분(43.4%)에 현대건설이 갖고 있는 지분(8.3%)이 더해지면, 현대중공업(25.5%), 케이씨씨(5.1%) 등 범 현대가를 충분히 압도할 수 있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됨에 따라 현대그룹에서는 잔치 분위기가 연출됐다. 임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얼싸안았다. 현 회장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인수전을 주도한 임직원들에게 일일이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들뜬 분위기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그룹 측은 사옥 로비에서 출근하는 임직원들에게 백설기를 나눠줬다. 현대건설 인수를 자축하는 ‘축하떡’이었다. 떡을 주고받은 직원들은 서로 “고생 많았다”고 격려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그동안의 노고를 자축하는 작은 행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축배를 들기엔 아직 이르다는 지적이다. 축배가 독배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풀베팅’을 위해 외부에서 끌어들인 자금 부담이 만만치 않은 탓이다. 벌써부터 시장에선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현 회장은 지난 18일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묘소를 찾은 자리에서 이 같은 우려에 대해 일축했다.
현 회장은 5조5100억원에 대한 인수자금 조달에 대해 “그동안 국내외 투자자들을 충분히 접촉했다”며 “그 부분은 염려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 회장의 설명에 업계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현대그룹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현금성 자산이 1조5000억원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몽땅 털어 넣는다고 해도 4조원이 모자란다. 나머지는 계열사들과 재무적 투자자(FI)로부터 지원받는다고는 했지만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현대그룹이 제시한 자금조달 계획이 구체적이지 않아 5조5000억원을 마련하기 어려울 뿐더러 가까스로 모두 준비한다 해도 추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제 그룹이 쥐고 있는 현금을 제외하면 대부분 차입 형식이라 막대한 이자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만약 3조원을 차입했을 경우 금리를 연 5%만 적용해도 매년 이자를 1500억원씩 내야 한다.
또 현대건설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초기 자금도 마련해야 한다. 현대건설이 그룹 덩치와 맞먹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여기에 재무적 투자자에게 보장한 수익도 부담이다. 현대그룹은 투자자들과 맺은 계약 조건을 밝히지 않고 있다.

또 이 자리에서 현 회장은 채권단과 진행 중인 재무약정 체결 문제와 관련해 “기존 입장을 고수할 것”이라며 “현대상선이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현 회장 인수결정
자금은 계열사서

하지만 만에 하나 현대그룹과 채권단 간 재무약정이 체결된다면, 부채비율을 대폭 낮춰 재무구조를 개선해야 하기 때문에 현대그룹의 인수자금 마련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현재 은행업 감독규정에 따르면 주채권은행은 기업의 경영을 지도하고 재무구조개선을 유도하되, 만일 기업이 은행의 방침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감독원장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해당 기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일각에선 현대그룹이 과도한 차입금에 따른 ‘승자의 저주’에 걸리지 않으려면 오히려 재무약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를 결정한 것은 현 회장의 결심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그런 까닭에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된 지금, 승자의 영광은 모두 현 회장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인수에 동원되는 자금은 현 회장 개인 자금이 아니라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 등 계열사의 돈이다.
행여 ‘승자의 저주’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이는 현 회장의 결심 과정에서 아무런 의사표시도 못한 계열사와 주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된다는 얘기다.
현 회장이 ‘승자의 저주’에 대한 경계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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