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청와대 제공한 ‘대포폰’ 은폐 의혹
못 믿을 불법사찰 수사, 특검 불붙을까
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파문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원충연 사무관의 수첩을 공개, ‘BH 지시사항’이라고 적힌 것을 근거로 청와대가 사찰을 지시했다고 했음에도 뒷짐 지고 있던 여권이 총력 대응에 나섰다.
민주당이 수사과정에서 청와대가 공직윤리지원관실에 대포폰을 제공한 것이 밝혀졌으며 검찰이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는 의혹의 불씨를 키워 특검과 국정조사로 불법사찰 문제를 재수사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대포폰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려던 민간인 불법사찰 수사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대포폰과 관련한 의혹은 순식간에 파괴력을 갖춘 사안으로 급부상하며 불법사찰 문제의 ‘전환점’을 노리고 있다.
대포폰과 관련한 의혹은 지난 1일 대정부질문에서 터져 나왔다. 이석현 민주당 의원은 이날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한 물증과 폭로로 시선을 모았다.
저격수의 ‘한방’
이 의원은 먼저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청와대에 보고한 내사보고서를 청와대 개입의 물증으로 제시했다.
‘내사보고’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공직1팀’이 작성한 것이었다. 2페이지 말미를 보면 국정원도 내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의원은 “동료 의원에게 누가 될까봐서 보고서의 여러 군데를 종이로 가려 놓을 정도로 근거없는 내용들을 악의적으로 보고하고 있다”며 내사보고서가 의미하는 세 가지 사실을 짚었다.
첫 번째는 청와대가 지시만 한 것이 아니라 일일이 보고를 챙겨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이를 “청와대가 적극 개입했다는 확실한 물증”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완전하게 복원됐거나 USB에 내사보고서들이 충분히 들어 있다는 증거이며, 국정원이 내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의원이 제기한 의혹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검찰이 청와대 관련 여부를 조사할 목적으로 서울 시내 모처에서 청와대 고용노동비서관실 소속의 최종석 행정관을 조사했다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어 ‘믿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공직윤리지원관실 기획총괄과 소속의 장진수 주무관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영구 삭제하기 위해 수원에 있는 컴퓨터 전문업체를 찾았으며, 가기 전 대포폰을 이용해 업체와 통화했다는 사실을 검찰이 확인했음을 언급했다.
또한 검찰이 해당 업체의 통화 내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5개의 대포폰이 발견됐으며, 그 대포폰들은 그대로 청와대에 전달됐다고 말했다. 이 대포폰들은 청와대 행정관이 공기업 임원들 명의를 도용해서 만들었으며 비밀통화를 위해 공직윤리지원관실에 지급한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이 의원은 “서울중앙지검장은 대포폰 관련해서 사건의 엄청난 파장을 우려, 청와대 민정수석과 상의한 후에 수사 검사들에게는 입단속을 시키고 내사 기록으로만 남겨두라고 지시해서 사건을 덮었다고 한다”며 “나중에 문제가 터지면 내사 중이었다는 답변으로 피해갈 방법까지 마련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키웠다.
그는 “청와대의 사찰 개입 관련해서 물증과 새로운 정황을 제기한 것”이라고 이 장관에게 검찰 지휘권을 발동해 재수사를 시킬 것을 촉구했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이 의원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며 “재판 중인 법원에서 얘기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의혹이 제기되자 민주당은 총공세에 나섰다. 손학규 대표는 지난 5일 서울 영등포당사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대포폰 논란으로 나라가 시끄러운데, 문제의 본질은 청와대가 직접 민간인 사찰을 주도하고 은폐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라며 정부 차원의 재조사와 특별검사제 도입, 국정조사 실시를 요구했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단순히 청와대와 총리실 직원의 전화기 대포폰 몇 대가 문제가 아니라 5000만 국민을 감시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권 본질을 드러낸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사안이 커지자 검찰은 “문제가 된 대포폰은 1대”라며 “범죄 혐의와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 청와대도 “대포폰이 아닌 차명폰으로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한나라당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안형환 대변인은 민주당이 제기한 의혹에 대해 “이것은 대포폰이 아니며 엄밀히 말해 ‘차명폰’”이라며 “이 의원의 주장처럼 청와대가 하명을 내린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안 대변인은 이어 “지금까지 사실관계를 파악해본 결과 청와대 행정관이 지인의 이름을 빌려 동의하에 쓴 차명폰”이라며 “범죄 목적으로 이름을 훔쳐 쓴 ‘대포폰’과 엄밀히 다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될 게 없다?
또한 그는 “검찰이 이를 은폐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 아니”라며 “검찰 조사를 통해 차명폰의 존재가 밝혀진 것이다. 은폐하려 했다면 처음부터 조사할 이유가 없었다. 차명폰을 쓴 것은 맞지만 이 행위 자체를 범죄라고 할 수 없어서 사실관계만 자료에 써 넣었다는 것이 검찰입장”이라고 적극 해명했다.
오히려 안 대변인은 “민주당이 강기정 의원의 김윤옥 여사 로비 몸통설을 덮기 위해 차명폰 사건을 워터게이트 사건이니 하면서 본질적 내용도 모르면서 정치공세를 하고 있다”고 역공을 폈다.
하지만 당내에서도 불법사찰에 대한 재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민주당도 제2, 제3의 폭로전을 준비하는 것으로 전해지는 등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여서 ‘대포폰’을 시작으로 한 전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