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금력과 함께한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기 마련이고 당연한 듯 ‘후원자’들이 따라붙는다.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주는 이는 그의 뜻을 지지하는 국민들 중 누군가 일 수도 있고, 동료·선배 정치인일 수도 있다. 또는 ‘잘 봐달라’는 속내를 담은 정·관계 인사들의 목적성 후원금일 수도 있다. 이 같은 후원금은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이에게로 고여 들고는 한다. 아예 ‘후원자’를 자처하며 나서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후원자’들은 권력의 푸른 잎이 생생할 때까지만 호가호위를 즐겼다. ‘살아있는 권력’이 ‘죽은 권력’이 되는 순간, 후원자들의 잔혹사는 여지없이 되풀이 됐기 때문이다.
“뜻 좋아서” “한 몫 챙겨볼까” 정치인 후원나선 이들
큰 권력 아래 누릴 만큼 누리고 고난의 가시밭길행
정치인 후원자들의 행로는 되풀이 돼왔다. 각기 다른 곳에서 시작해 밀거니 끌거니 하며 산을 오르는 과정에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권력이라는 정상에 서는 순간 하산하는 길은 같았다.
권력형 게이트
뒷모습 보이는 후원자
역대 대통령들에게 정치적, 물질적 후원을 했던 측근 인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권력형 게이트’에 얽혀 좋은 ‘끝’을 보지 못했다. ‘산 권력’ 아래 호가호위를 했던 수많은 인사들이 권력의 끝자락에서는 쇠고랑을 찼다.
노무현·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비자금 의혹으로 홍역을 치러야 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현철 게이트’, 김대중 전 대통령은 ‘홍삼 게이트’로 급격한 레임덕에 휘말려야 했다. 그러나 ‘후원자 잔혹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 대에서 일어났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그가 대통령직에 오르리라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부터 곁을 지켜온 후원자 두 명이 있었다.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에서 “모든 걸 털고 가겠다”는 박 전 회장의 진술로 궁지에 몰렸다. 노 전 대통령에게 불법 정치자금이 건네진 정황이 밝혀진 것은 물론 전 정권 실세들이 줄줄이 서초동으로 향하게 된 것. 노 전 대통령은 박 전 회장이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며 반발했지만 자신은 물론 가족과 측근들까지 검찰로 불려가는 일을 막지는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입문 시기부터 10년 넘게 지원해온 ‘후원자’였지만 결국 참여정부를 송두리째 뒤흔든 게이트의 주역이 된 것이다.
‘박연차 게이트’가 불거진 후 정가 일각에서는 그를 ‘재정적 후원자’로, 강 회장을 ‘정치적 동지’로 구분하기도 했다. 박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을 후원한 만큼 돌려받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노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자 박 전 회장은 사업 확장에 나섰다. 참여정부 동안 신발산업회장을 지냈으며 세종증권 주식투자와 농협의 자회사인 휴켐스 인수로 짭짤한 이익을 봤다. 골프장을 건설하는가 하면 베트남 화력발전소 건설 국책사업 입찰 성공까지 사업은 크게 성장했다. 정치권력을 이용해 수백억원의 특혜를 받은 것.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가자 그들의 ‘인연’도 마침표를 찍었다.
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의 친형인 건평씨의 부탁으로 노 전 대통령을 후원하게 된 박 전 회장과 달리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를 보고 후원을 결심했다.
1998년 서울 종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노 전 대통령이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적지 않은 돈을 후원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후 2000년 노 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출마하자 강 회장은 직접 노 전 대통령을 찾아가 “당신 같은 정치인이 성공하길 바란다”며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응원했다. 호남 출신인 강 회장이 ‘제2의 고향’인 부산에서 사업을 하면서 설움을 겪었고 지역주의 타파를 실천하던 노 전 대통령과 정서적인 ‘동질감’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 오르고도 강 회장의 사업은 변함이 없었다. 강 회장은 입버릇처럼 “지난 5년 동안 사업을 한 치도 늘리지 않았다. 이것저것 해보자는 사람이야 오죽 많았겠나. 그래도 그렇게 하면 내가 대통령 주변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기 때문에 일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도 “강 회장은 단 한 건의 이권도 청탁한 일이 없으며 아예 그럴 만한 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한 뒤에는 매주 봉하마을에 내려갔으며 주변 사람들을 챙겼다. ‘박연차 게이트’의 여파로 봉하마을에 세간의 시선이 집중됐을 때도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강 회장은 불법정치 자금 문제로 검찰에 소환되자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대통령을 도왔다는 일이 이렇게 정치탄압을 받는 것… 달게 받겠다”면서 입을 다물었다.
강 회장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애정도 각별했다.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 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오직 강 회장만을 위한 글을 올렸다. 그는 강 회장에 대해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라면서 “나와 하는 일은 다르지만 세상을 보는 생각이 같아 뜻을 같이 하고 있다. 정치적 성취에 큰 보탬이 됐고 나 대신 고초도 겪은 특별한 인연”이라고 소개했다.
강 회장도 ‘후원자’라는 이름으로 박 전 회장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에 대해 “박연차와 나는 레벨이 다르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결국 두 ‘후원자’로 인해 노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참여정부 핵심 인사 대부분이 검찰 조사를 받았으며, 후원자 본인들도 수난을 겪었다.
역대 정권 후원자
정권 바뀌면 ‘잔혹사’
이명박 대통령이 서초동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얽힌 비리 수사 때문도, 강기정 민주당 의원이 제기한 김윤옥 여사의 대우조선해양 남상태 사장 연임 로비 의혹 때문만은 아니다. 정권 초부터 계속해서 잡음을 내온 그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때문이다.
천 회장은 이 대통령의 고려대 61학번 동기로 수십년간 인맥을 이어온 절친한 친구다. 또한 지난 대선 당시 고대 교우회를 이끌며 이 대통령을 도운 든든한 후원자다. 하지만 현 정권 출범 후 갖가지 의혹에 시달리며 이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으로 통하고 있다.
천 회장은 대선 과정에서 이 대통령의 당비를 대납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법정까지 갔다. 민주당이 “천 회장이 이 대통령의 한나라당 특별당비 30억원을 대납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을 두고 한나라당이 허위사실로 검찰에 고소했고, 민주당이 무고죄로 한나라당을 맞고소하며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던 것. 하지만 민주당이 재판에 불참하면서 소송이 취하됐다.
MB 후원회장 천신일 ‘후원회장 잔혹사’ 이어갈까
‘제2의 박연차 사태’로 집권 3년차 게이트 열리나
이후로도 박 전 회장으로부터 세무조사 무마 청탁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우제창 민주당 의원이 제기한 포스코 회장 인사 개입 의혹도 있다. 우 의원은 “천 회장이 두 차례 윤석만 당시 포스코 사장에게 전화를 해 ‘대통령이 정준양(당시 포스코건설) 사장으로 결정했다. 바꿀 수 없다’고 외압을 넣었다”고 주장했다.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의 연임 로비 의혹에서도 천 회장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의 유임인사 로비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은 대우조선해양의 한 협력업체의 자금 흐름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천 의원의 자녀 3명이 대우조선해양 협력업체 3곳의 지분을 보유 중인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대해 강기정 민주당 의원은 검찰에 대우조선해양 협력업체 비자금 조성과 로비 의혹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며 “친인척 권력형 비리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눈을 빛냈다.
이 같은 의혹들은 대부분 유야무야 넘어갔다. 하지만 최근 이수우 임천공업 대표로부터 대출 청탁과 세무조사 무마 등 청탁과 함께 40여 억원의 금품을 받은 의혹이 제기됐다.
나아가 강 의원이 대정부질문을 통해 “검찰이 갑자기 천신일 수사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보고 일각에서는 더 큰 비리를 감추기 위한 ‘몸통 자르기’라는 말도 있다”면서 “이수우 임천공업회장 비자금 조성 사건은 천신일이 아니라 남상태 연임 로비 사건이 핵심”이라는 주장을 펴며 사안이 점차 복잡해지고 있다.
강 의원이 “지난 7월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의 연임 로비 의혹이 증폭되자 무마한 세력이 있다고 제시한 바 있다”며 “남상태 연임 로비 과정에서 불법 로비 자금이 광범위하게 뿌려졌고 이를 비호하기 위해 권력의 핵심부가 총동원돼 수사가 무마됐다. 배후의 핵심은 김윤옥 여사”라고 지목하며 천 회장은 물론 김윤옥 여사까지 사정권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 대통령도 ‘강 건너 불구경’ 하다 청와대 앞마당에서까지 불길이 치솟는 모습을 보게 됐다는 절박함을 느끼게 된 것.
천 회장은 박 전 회장처럼 단순한 재정 후원자가 아니라 강 회장 같은 ‘정치적 동지’다. 하지만 정권 출범 후 그의 이름이 빠지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게 문제다. ‘천둥이 잦으면 비가 내리기 마련’이라고 자칫 하다가는 집권 3년차 권력형 게이트의 불씨를 당길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
‘MB의 남자’
후원자일까 동지일까
현재 외국에 머무르고 있는 천 회장은 G20 정상회의 후 귀국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야권은 천 회장에 대한 총공세를 할 것으로 보인다. ‘집권 3년차 게이트’가 정권의 최측근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매서운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
정치권도 ‘대통령 후원자’들의 잔혹사가 천 회장을 통해 되풀이 될지 여부에 눈을 빛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