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김우일의 한국재계 30년 비사

2008.10.11 15:27:23 호수 0호

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 함수관계 ⑬전두환 편
 


정부와 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아가 대통령과 총수는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함수관계다. 그동안 기업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어떤 배에 타느냐에 따라 순항과 표류를 반복해 왔다. 유독 거침없이 승승장구한 신흥 재벌이 있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비운의 총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공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요시사>는 ‘대우 제국’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 ㈜대우M&A 사장이 박정희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정·재계 실세들과 부대끼면서 겪은 ‘한국재계 30년 비사’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간 애증관계를 연재하기로 했다.

대통령에 대한 순명이냐 항명이냐. 인수자로 거명 받은 재벌그룹 총수들은 순명을 하자니 적자기업의 부메랑효과로 거꾸로 기존기업의 생명이 위태롭고, 항명을 하자니 대통령의 칼날이 다가오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순명을 해도 위태롭고 항명을 해도 위태롭고 이래나 저래나 위태롭기는 매일반이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졌다.

대우그룹, 재계 최초로 ‘시드머니’로 인수추진
모든 총수들은 기획조정실을 중심으로 그 해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으나 이 벼랑 끝의 상황을 풀어 볼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인수절차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해 이미 국민들에게 경제타국을 위해 발표해버린 해외건설업체에 대한 정상화 작업이 무용지물이 될 염려가 있었다. 이는 대통령의 절대적 권위에 먹칠을 한 셈이었다.

대통령은 연일 총수들에 대한 인수독촉을 하기 시작했다. 총수들은 연합체를 만들어 부실기업의 무조건 인수에 대한 부당성을 대통령보다는 그 밑의 장관에게 읍소했지만, 돌아온 것은 대통령의 확고부동한 의지뿐이었다. 대통령도 해외건설업체의 파국과 경제혼란을 막는 길에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총수들이 손을 놓고 있는 상태에서 경남기업을 인수한 대우그룹은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연일 회의를 열고 머리를 맞댔다. 도전정신으로 뱃머리 역할을 자청했다. 될 때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이 그룹의 기본정신이었다.

“경남기업의 부실이 얼마야?”

“예, 기존공사의 부실이 3천8백22억원, 남아 있는 향후공사 완공시 예상손실 1천1백57억원입니다. 그래서 합계 4천9백79억원의 손실이 예상되고 우리가 이를 인수시 고스란히 떠안아야 합니다.”

당시 경제상황으로 엄청난 부실이고 손실이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이때 김우중 회장이 기가 막힌 묘안을 내놨다. 그의 머릿속에는 추사 김정희의 말이 떠올랐다.

‘百尺竿頭 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백척간두 진일보 시방세계현전신)’

벼랑 끝에 몰렸을 때는 오직 벼랑과 발끝만이 눈앞에 보이고, 한치 앞도 안보이던 것이 한 발 내디디면 보이지 않던 사방세계가 보인다는 뜻이다. 즉 위험을 무릅쓰고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발을 디디면 새로운 돌파구가 찾아진다는 것이다. 반대로 앞에 나가면 죽을 까봐 벼랑 끝에 서서 꼼짝 않고 서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는 얘기다.

“이봐 우리가 인수해서 우리가 죽으면 안 되잖아 우리가 살길을 찾아야지. 이렇게 생각해봐 우리가 떠안아야 하는 손실 예상분 4천9백79억원을 인수한 경남기업에서 수익을 창출해 갚으면 되잖아. 지금 경남기업은 아무 것도 없으니 이 수익을 창출할 씨앗을 받아 우리가 가꿔서 나무로 만들어 갚으면 되는 거야. ‘씨앗자금’을 얼마 받으면 손실을 다 커버할 수 있는 거야?”

필자는 열심히 계산했다. 씨앗자금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느냐가 또 하나의 문제였다. 결국 적당한 이율의 운용수익을 가정해 손실 4천9백79억원을 다 갚는 데는 약 2천억원의 씨앗자금이 필요했다. 이것이 바로 ‘시드머니(SEED MONEY)’이었다. 아마 우리나라 역사상 시드머니라는 개념을 가지고 기업의 인수절차를 마무리한 것은 이 경남기업의 예가 전무후무할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시드머니를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대통령의 지시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과연 무소불위의 대통령이 이를 수락할 것인가. 무작정 재벌에게 떠안겨 해결 하려는 대통령의 의지를 무슨 수로 설득시킬 것인가. 잘못하면 괘씸죄로 도리어 화를 자초하지 않을까하는 심정으로 답답했다.

그러나 김정희의 진일보하라는 명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 회장은 대통령을 독대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격이었다. 잘되면 대우그룹의 경남기업인수 뿐만 아니라 다른 건설업체의 인수도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지만 잘못 되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대우그룹만 치명타를 입게 된다. 더 나아가 국민경제가 위태롭게 된다. 실무자는 실무자대로 경제장관을 만나 시드머니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각하, 인수하면 인수기업은 그 부실로 그냥 넘어집니다. 인과관계 없는 남의 부실을 아무조건 없이 인수한다는 것은 전혀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저희 그룹마저 연쇄적으로 부실이 되는 도미노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되면 협력회사를 비롯해 수많은 회사가 도산돼 국민경제가 무너집니다. 그 부실을 갚을 수 있는 시드머니를 주시면 이 시드머니를 운용해 모든 부실을 상환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발만 내디디면 보이지 않던 사방세계가 보인다’
전전긍긍했다. 그 결과에 따라 대우그룹은 물론 경남기업 및 모든 해외건설업체의 운명이 달렸다. 군인으로만 지내온 대통령이었지만 그의 판단과 추진력은 일품이었다. 즉각 오케이였다. 드디어 마술사가 마술을 부리듯이 경제부처에서 전화가 왔고, 외환은행을 통해 시드머니의 공급에 관한 절차가 진행됐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기업이 가지고 있는 부실 및 가공자산은 사외유출 경로를 파악해 불분명할 경우 대표자가 가져간 것으로 인정, 대표자 인정상여로 때리게 돼 있고 기업은 인정상여에 대한 소득세 원천징수를 미리 해 세무서에 지급하게 돼 있었다. 이 세법을 적용하면 경남기업은 약 1천억원의 세금을 미리 내야 했다. 또 부실 및 가공자산을 손실로 반영해야 하는 것이 회계처리 원칙인데 이를 손실로 반영할 경우 경남기업은 대외적인 엄청난 적자노출로 신용을 잃게 된다. 신용상실은 그대로 기업의 파산을 의미한다.

이 세법과 회계원칙적용을 배제하지 않으면 아무리 시드머니를 가지고 기업을 인수한다 하더라도 정상화를 도모할 수가 없다. 또 다른 묘수가 필요했다. 청와대, 재경부, 은행 등과 협의 끝에 기상천외한 해법을 찾았다. 조세감면규제법에 산업합리화조치에 특혜조항을 두는 것이다. 산업합리화조치에 따른 기업인수시 가공자산의 대표자인정상여에 기업의 원천징수의무를 배제하고 부실자산을 손실로 처리하지 않고 이연자산으로 회계처리할 수 있는 예외적용을 뒀다.

이연자산은 손실로 처리됐지만 자산과 수익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간주해 재무제표상 손실로 표시되지 않고 자산으로 표시되는 계정이다. 창업비, 개발비, 시험연구비 등과 같은 과목인데, 이런 과목은 실제로 자산과 같아 5년간 매년 상각 처리하도록 하고 있다. 부실 및 가공자산은 실물이 없는 것으로 횡령했거나 아니면 이익숫자를 만들기 위해 허위의 자산을 계상해 놓은 것이다. 이런 가공의 자산을 개발비, 시험연구비 등과 같이 취급해 자산성을 인정했으니 그 특례조치가 얼마나 초법적인 것이었는지 알만했다.

필자의 머리에서 나온 이 특례조치는 그야말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반드시 해야 할 필요조치였다. 이 조치가 아니었다면 지금 해외에서 최고의 건설수주를 받는 한국건설업체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시드머니와 예외조치 덕분으로 다른 그룹의 해외건설업체의 인수도 순조롭게 이행됐다. 사상누각의 한국해외건설업계가 새로운 이정표를 다는 셈이었다.

인수대상 열외 A그룹 백지화 등 훼방 작업
재벌그룹들내에서 이상한 얘기가 떠돌았다. 당초 부실 해외건설업체의 인수 대상자에서 열외됐던 재벌그룹이 상대적 박탈감과 경영위기감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인수업자 선정에서 배제됐을 때는 엄청난 규모의 부실덩어리라는 폭풍우를 피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지만, 시드머니와 특혜조치라는 새로운 당근이 주어지는 인수조건이라면 마다하기는커녕 쌍수를 들어 인수자 대열에 끼어야 했던 것이다. 여러 분야를 거느리는 재벌그룹 총수의 입장에서 보면 해외건설이라는 업종은 그룹 확장과 대외 이미지상 절대 놓칠 수 없는 좋은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박탈감을 느낀 그룹이 바로 A그룹이었다. A그룹은 건설업종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그 건설업체가 다른 경쟁그룹에 비해 약하기 그지없었다. 해외건설은 물론 국내건설에서의 기반도 대단히 약했다.

물론 A그룹의 총수는 전자업종에의 치중 때문에 건설업에 별로 무게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시장 앞에 내던져진 그룹간의 경쟁대열에서 해외건설의 비중은 절대 약하지 않았고 경쟁그룹의 해외건설업 인수확장은 그에게 위기감과 초조감으로 다가왔다.

A그룹 총수는 모험수를 던졌다. 대우그룹의 경남기업 인수를 백지화하고, A그룹이 대타로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정리=김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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