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의 굴곡 끝에 기아 복귀 김진우

2010.09.07 09:15:00 호수 0호

“마지막이란 각오로 뛰겠습니다”


‘제2의 선동열’로 불리며 7억원에 프로 입단
음주·폭행·선수단 이탈 등으로 ‘임의탈퇴’

‘풍운아’가 돌아왔다. KIA 김진우가 힘겹게 그라운드를 밟는다. 이번 팀 합류는 조건부이긴 하지만, 3년 만에 자기 자리를 찾을 기회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교시절 ‘제2의 선동열’로 불린 김진우는 프로 입단 때부터 KIA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광주진흥고 3학년이던 2001년 LA다저스로부터 320만달러의 입단 조건을 제시받기도 했던 김진우는 이를 뿌리치고 당시로선 역대 최고인 계약금 7억원에 KIA 유니폼을 입었다.

시작은 화려했다. 입단하자마자 12승을 거두며 단번에 KIA의 주축 선발투수로 스타덤에 올랐다. 2003년에도 11승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2004년 초 무릎 수술을 받았지만, 이를 극복하고 후반기 복귀해 7연승을 달렸다. 그해 4강 탈락이 유력했던 KIA는 김진우의 활약 덕분에 가을잔치에 나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팀의 에이스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사생활이 문제가 됐다. 음주, 폭행, 선수단 이탈 등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KIA 구단은 잇단 부상 재발과 정신적 방황이 원인이라고 했다. 구단과 동료들의 신뢰가 급격히 무너졌다. 2005년 6승, 2006년 10승을 올리며 나름의 활약을 이어갔지만 좀처럼 안정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다 2007년 6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부상과 컨트롤 난조로 부진을 겪으며 2군으로 떨어진 김진우는 선수단에서 또다시 이탈해 버렸다. 결국 참다 못한 KIA는 임의탈퇴라는 극단적 조치를 내렸다.

이후 김진우는 훈련 재개-잠적이란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2007년 11월 방황을 멈추고 모교인 진흥고에 모습을 드러내 마음을 잡는 듯 보였지만 훈련 의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8년에는 KIA 구단과도 연락을 끊고, 예비군 훈련에 불참하는 등 방황이 이어졌다.

그해 가을 김진우는 다시 광주에 나타나 운동을 시작했다. 근거리에서 지켜보던 KIA는 외부 코치를 붙여주며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2009년 초에는 경찰청 야구단에서 훈련을 했다. KIA는 그런 김진우와 만나 복귀 절차를 논의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자 다시 등을 돌려 버렸다. 어떻게든 김진우에게 힘을 보태주려 했지만, 반복되는 실수를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 김진우는 지난 3월 일본 독립리그 소속의 코리아해치의 부름을 받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다시 원점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개인훈련을 해오던 김진우의 선택은 결국 ‘본가’ 타이거즈였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KIA 구단의 문을 두드리게 됐고, KIA는 마지막 기회를 줬다.

김진우는 지난 8월30일 1군 선수단이 훈련 중이던 광주구장을 찾아 선수단에게 인사와 함께 사과의 뜻을 전하고 조범현 감독에게도 인사했다.
김진우는 “다시 받아들여줘 감사한다. 지난날의 죄송스러웠던 일은 되풀이하지 않고,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겠다”며 고개 숙였다.

이에 서재응은 “네가 어떻게 해야되는지 가슴에 새기고, 전 같은 짓을 다시 하게 될 때면 이 팀에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됐는지를 생각하면 좋겠다”고 따끔하게 일렀다.

이어 “우리는 이제 가족이다. 눈치보고 신경 쓸 필요 없다. 이제 돌아왔으니 예전처럼 고참들이나 동료나 다들 똑같이 해줄테니 선수단에서 눈치는 보지 말라”고 따뜻하게 말했다.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