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성향 판사들의 모임 ‘우리법연구회’가 국감장을 흔들었다. 참여정부 시절 회원 다수가 청와대, 행정부, 사법부 요직에 오르며 사법부 내 이너서클로 떠올랐던 우리법연구회는 한동안 법사위 국감의 단골메뉴로 거론되곤 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공직에 나섰던 주요 인사들이 우리법연구회를 탈퇴했음에도 우리법연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달 민일영 대법관의 인사청문회에 이어 이번 국감에서도 우리법연구회를 해체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 이에 우리법연구회도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참여정부 시절 사법 개혁 주장하던 법조계 연구모임
매머드급 덩치에 회원들 공직 진출, 요직 차지로 눈길
법조계 내 여러 모임들 중에서도 우리법연구회는 정치권에서 그 이름이 더 많이 거론되는 대표적인 모임이다. 1988년 출범 후 17년 동안 외부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바 없지만 2005년 공식 활동을 선언한 후 드러난 파워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진보성향 판사 모임
참여정부서 권력으로 주목
우리법연구회는 지난 1988년 6·29 선언 후에도 제5공화국에서 임명된 사법부 수뇌부가 유임되자 이에 반발해 2차 사법파동을 주도한 진보성향 판사들의 모임이다. 당시 판사로 있던 김종훈 강금실 강신섭 오진환 유남석 박윤창 이광범 등 7명과 사법연수원 수료 후 바로 개업한 박종술 이태화 이양원 변호사가 창립회원이다. 이들은 1993년 3차 사법파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2003년 대법관 임명제청 파동을 주도한 판사 상당수가 이 연구회에 소속돼 있었다.
우리법연구회는 한 달에 한 번씩 세미나를 갖고 월례회에서 발표된 논문은 5년 정도의 주기로 논문집으로 묶어 발간해왔다. 그동안 발간한 논문집은 다섯 권으로 노동·여성·인권·북한 등 사회 주요 현안에 대해 다루고 있다.법조계 학술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법연구회가 본격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사법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내왔던 우리법연구회가 취임과 함께 ‘사법개혁’을 주장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동반자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 그간 우리법연구회는 140여 명이 속한 거대모임으로 성장했으며 출신 인사들이 주요 공직에 나서면서 주목받았다.
강금실 변호사와 박범계 변호사가 각각 참여정부 초대 법무장관과 청와대 비서관에 발탁됐으며 박시환 변호사는 대법관에, 김종훈 변호사가 대법원장 비서실장에, 이광범 판사가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에 임용됐다. 이 외에도 회원 다수가 사법부의 이른바 ‘요직’이라 불리는 법원행정처에 자리를 잡았다. 참여정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며 잠시 세간의 이목에서 벗어났던 우리법연구회는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 의혹으로 다시금 논란의 중심에 섰다.
우리법연구회 회원이자 촛불집회 관련 재판의 배당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이정렬 서울동부지법 판사와 송승용 울산지법 판사가 이메일 파문과 관련, 사법부 지도부에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글을 법원내부 통신망 ‘코트넷’에 올린 것이 법조계 안팎을 들썩인 것. 우리법연구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문형배 부산지법 부장판사는 “우리는 학술연구 단체일 뿐”이라며 “연구회 차원에서 이번 사안을 논의한 바가 없다”고 해명했다.
문 부장판사는 이정렬, 송승용 판사 글에 대해 “개인 의견일 뿐”이라며 “우리법연구회는 ‘상명하복’ 단체가 아니다. 연구회 차원에서 이번 사태에 입장을 밝힐 계획은 전혀 없다”고 거듭 강조했으나 논란은 가시지 않았다.
지난달 민일영 대법관의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우리법연구회에 대한 문제제기에 집중했다. 정미경 의원은 민 대법관을 향해 “우리법연구회의 활동에 대해 법원의 사조직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며 “우리법연구회를 조사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대법관 인사청문회 이어
국감서 우리법연구회 해체 논란
조해진 의원도 “우리법연구회에 소속된 판사의 판결을 보면 양심적 병역거부, 노조 불법, 광우병 시위 사건 등 색깔 있는 판결을 일관되게 내놓고 있고 일부에선 특정인을 대법관에 옹립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움직였다는 시각이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민 대법관은 “우리법연구회의 성격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법관이 정파적 이해관계를 재판에 반영하면 공정성이 흔들리기에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특정 이념을 갖고 재판할 것이라고 속단하는 것도 문제”라는 말로 여당 의원들의 추궁을 피했다.
이번 국감에서는 이주영 의원이 우리법연구회의 해체를 주장했다. 이 의원은 국회 법제사법위 대전고법 국감에서 “우리법연구회는 최근 신영철 대법관 문제와 관련한 판사회의를 주도하면서 일선판사들의 집단행동을 부추겼다. 특히 우리법연구회 초대 회장인 박시환 대법관은 제5의 사법파동 운운하며 법원 내 분열을 야기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년 넘게 비공개로 운영하다가 시민단체 등의 명단공개에 밀려 지난 9월1일 학술단체로 등록했지만 몇 차례 있었던 사법파동의 발원지인 우리법연구회를 순수하게 연구하는 판사들의 모임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면서 “법원의 신뢰회복을 위해서도 우리법연구회는 해체해야 하고 계속 유지하면서 물의를 일으킨다면 법관 재임용 시 배제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으로 나온 연구모임
‘하나회’ 비판에 정면 반박
이 의원은 우리법연구회를 “헌법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모인 일종의 사조직으로 이념적 단체처럼 보인다”며 “오해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연구회가 자초한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우리법연구회의 일부 판사가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개입을 비난하면서 법원회의를 주도하거나 법원 인사에 불만을 표출하는 것은 결코 학술연구로 이해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법연구회도 이러한 비판에 잠자코 있지만은 않았다. 우리법연구회는 “학술모임답게 회원 명단과 연구회 사이트를 공개하는 등 활동을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김용담 전 대법관의 충고처럼 최근 법원 내부전산망 ‘코트넷’에 정식 학회로 등록, 자체 세미나 일정 등을 법원 구성원들에게 알리고 있다. 또한 지난 10일에는 태동한지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적인 자리를 마련, 폐쇄적인 법원 사조직이라는 법조계 안팎의 비판에 정면 대응했다.
이날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회의실에서 열린 공개세미나에는 문형배 부장판사를 비롯해 40여 명이 참석했다. ‘노동사건 심리의 문제점’을 주제로 우리법연구회 회원인 최은배 인천지법 부장판사의 주제발표와 김성수 서울중앙지법 판사, 이병희 수원지법 판사의 토론이 있었다. 이병희 수원지법 판사는 지정토론에 앞서 “우리 연구회가 가지는 차별성 및 강점은 실제 개별사건을 처리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만큼 문제제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법제화되거나 또는 해석론으로 정착됐을 때 발생하는 법포섭이나 법집행의 난점, 다른 제도와의 충돌의 문제점까지도 예상해가며 고민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활기 띤 첫 공개 세미나, ‘법조계 내 하나회’ 비판 반박
보수 시민단체 통해 현직, 탈퇴 회원 명단 공개
문 부장판사는 이 자리를 통해 “우리법연구회는 ‘사법부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판사직까지 걸었던 사람들의 모임”이라며 “헌법을 유린하고 권력을 사유화한 하나회에 비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법조계의 하나회’라는 비판을 반박했다. 이어 “우리법연구회의 목표는 법원의 개혁이 아니라 법관의 자기 개혁”이라며 “힘없는 사람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사법부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시사적인 문제일지라도 법률가가 다뤄야 할 성격의 것이라면 회피하지 않겠다”며 “‘정의를 세워라. 그러면 교만이 망할 것이다’라는 격언을 명심하고 헌법을 실현하는 범위 안에서 애국심을 발휘하겠다”는 각오를 전했다. 우리법연구회는 홈페이지를 꾸리고 “성년을 맞아 그 동안 쌓아온 정체성을 잘 간직하면서도 더욱 성숙한 연구회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며 “대의의 심지가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열린 자세로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 균형 잡힌 연구회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뜻도 전했다.
또한 “이를 위해 팽팽한 문제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성실한 자세로 연구와 토론의 수준을 심화하고, 회원들의 참여를 제고하며, 보다 개방적이고 포용력 있는 자세로 법조와 사법에 기여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 나가겠다”고 밝혔다. 홈페이지에는 인사말과 연혁 등 우리법연구회 소개만 공개돼 있으며 운영위원과 회칙, 공지사항 등 주요 게시물은 회원가입 후 승인 절차를 거치고서야 열람이 가능하다.
우리법연구회가 ‘커밍아웃’을 선언했지만 아직까지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는 만큼 명단을 공개하라는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언론보도와 최근 보수성향 시민단체가 공개한 명단을 확인하면 대략적인 우리법연구회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법연구회에 속한 회원들의 구체적인 수치가 거론된 것은 2005년부터다. 당시 우리법연구회는 부장판사 20여 명 등 현직 판사 120여 명과 판사 출신 변호사 20여 명 등 15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용훈 대법원장이 우리법연구회에 대해 “법원에 이런 단체가 있어선 안 된다. 젊은 판사는 모르겠지만 부장판사 등 연장자들은 탈퇴하는 게 좋겠다”고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광범 부장판사와 김종훈 박범계 변호사 등 일부 회원들이 탈퇴했다. 지난 8월15일 보수성향 시민단체인 자유주의진보연합에 의해 우리법연구회의 회원 명단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들이 공개한 회원 명단은 180여 명으로 부장판사급 20여 명을 비롯한 현직 판사 회원 129명과 탈퇴자 53명이다.
소속 회원 누구?
명단 공개에 쏠린 ‘눈’
현직 판사 회원들은 대법원, 고등·지방법원, 특허법원, 사법연수원, 법원행정처 등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연수원 기수도 17회부터 37회까지로 다양했다.
우리법연구회 측은 그러나 이 명단은 현 시점이 아닌 지난해 말이나 올해 초를 기준으로 작성된 것으로 이미 탈퇴했거나 사실상 탈퇴한 회원들도 상당수 포함됐다고 밝혔다. 이주영 의원은 이번 국감에서 “현재 대전고법에 2명, 대전지법에 6명, 청주지법에 1명, 특허법원에 2명이 우리법연구회 소속 회원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