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의 머니톡스> 세계 3위, 깜깜이 국민연금

  • 조용래 작가
2025.09.29 14:47:28 호수 1551호

대한민국 국민연금은 운용 자산 규모 면에서 세계 3위다. 국민의 노후와 국가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떠받치는 중추적 기둥이다. 하지만 그 운용 방식을 들여다보면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마치 거대한 금고 속에서 무엇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국민 누구도 알 수 없는 ‘깜깜이 운용’에 가깝다. 거버넌스와 정보 공개의 불투명성은 다른 선진국 연기금과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하다.

국민연금 기금 운용의 큰 틀은 ‘기금운용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이 위원회의 의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는다.

전문 운용역이나 독립적 전문가가 아니라 현직 장관이 최종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는 구조다. 기금운용위원회는 정치·관료·이익집단 대표가 섞여 구성돼있는데, 전문성보다는 이해관계의 타협과 정치적 고려가 앞설 수밖에 없다.

세계 연기금 상위권 국가에서 이런 깜깜이 운용 구조를 가진 연기금은 단언컨대 한국밖에 없다. 캐나다의 CPPIB나 네덜란드의 ABP는 이사회 중심의 독립적 거버넌스를 갖추고, 정부 부처가 직접 의사결정을 좌우하지 않는다. 정부가 기금의 주인 행세를 하는 구조는 매우 기형적이고 특수한 한국만의 현상이다.

공시 제도만 보면 국민연금은 매월, 매분기, 매년 운용 성과를 발표한다. 그러나 실제를 들여다보면 그 내용은 ‘큰 틀의 자산 비율’ 정도에 그친다. 예컨대 “국내 주식 15%, 해외 주식 30%, 채권 40%”와 같은 비율은 공개되지만, 그 안에 어떤 종목, 어떤 지역, 어떤 파생상품이 포함돼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투자 내역, 특히 해외와 대체자산은 ‘깜깜이 운용’이라 해도 변명할 수 없다.

해외 대체 투자와 파생상품 운용 내역은 완전히 블랙박스다. 해외 인프라, 사모펀드, 프로젝트 부동산 등은 ‘카테고리’만 표시되고, 개별 투자처나 계약 조건은 공개되지 않는다.

파생상품을 통한 환헤지나 위험 관리 포지션도 외부에서 추적할 수 없다. 국민연금이 해외 부동산에 수십조원을 집행하면서도 중개 수수료와 성과 보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국민연금의 무책임한 태도는 무능이라 비난할 정도를 넘어 범죄 가능성을 두고 조사해야 할 행위에 가깝다. 청렴과 성실을 요구하는 국민에게 입증할 책임은 공직자에게 있다.

국민의 돈으로 특정인이나 특정 운용사에게 이익을 몰아줬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게 만드는 순간, 공적기금은 국민의 연금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사금고로 전락한다.

국민연금은 거대한 규모 때문에 모든 자산을 내부 인력으로 직접 운용할 수 없다. 주식거래의 상당 부분은 증권사 중개를 거치고, 해외 주식·대체 투자의 많은 비중은 외부 운용사에 위탁된다. 그러나 이 과정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는 국민이 알 수 없다.

어떤 증권사가 중개하는지, 어떤 운용사가 맡는지, 그 선정 과정과 계약 조건은 깜깜이 속에 감춰져 있다. 공식 문서에는 “공정한 절차에 따른 위탁 선정”이라는 원론적 표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세계 연기금의 선진 사례는 이미 나와 있다. 캐나다 CPPIB는 매년 해외·국내 상장 주식 보유 목록을 상세히 공개한다. 일정 규모 이상 투자한 종목은 회사명과 보유 금액까지 기록된다. 파생상품을 통한 간접 노출 방식도 주석으로 설명한다.

네덜란드 연기금은 더 나아가 거래 비용과 수수료까지 룩스루(Look-through) 의무에 의해 공개한다. “숨겨진 비용”을 반드시 드러내도록 제도화했기 때문에 국민은 기금이 실제로 얼마를 벌고, 얼마를 수수료로 지불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비교해본다면 한국의 국민연금은 세계적 대형 기금이면서도 ‘어디에 돈을 굴리고, 얼마를 수수료로 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유별난 불투명성을 드러낸다. 네덜란드는 거래 비용까지 공개하면서 업계 전반의 비용 절감을 이끌었다.


노르웨이와 캐나다는 해외 상장 자산 보유 목록까지 밝히면서 고도의 투명성과 독립적 지배구조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다.

반면 한국은 ‘국민의 돈’을 운용하면서 정작 국민에게는 어디에, 어떤 조건으로, 어떤 비용을 지불했는지 알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여전히 ‘정치와 관료의 틀’ 안에서, ‘브로커와 위탁사의 깜깜이 선택’ 속에서 국민의 자산을 굴리고 있다.

고도 민주주의 국가의 기금 운용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돈을 맡긴 국민이나 운용하는 쪽이나 강 건너 불구경하긴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

기금운용업계에서는 브로커 배분이나 위탁사 선정 과정에서 ‘비공식적 로비’나 ‘관계 관리’가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실제로 어떤 증권사에게 어느 정도의 브로커리지 물량을 배정할지, 어떤 위탁사와 장기 계약을 맺을지는 막대한 이권이 걸린 문제다.

이런 결정을 국민은 알 수 없고, 감사원이나 국회 감사 과정에서 일부 단편이 드러날 뿐이다.

국민연금 운용의 불투명성은 단순히 ‘투자 내역을 안 보여준다’는 차원을 넘어, 브로커리지 및 위탁 운용 선정의 일부 기준과 절차, 전 과정이 여과 없이 온전히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그것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무며, 연금제도의 정당성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다.

일반 금융기관의 펀드 운용역에게도 ‘푸르덴셜맨 의무(Prudent Man Rule)’라는 최소한의 책무가 부과된다. 남의 돈을 맡은 이상 합리적이고 신중한 관리자로 행동하라는 요구다. 그런데 정작 막대한 국민의 공적 기금을 다루는 관료에게는 그런 책임 의식조차 없지 싶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처럼 다짐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국민연금의 무책임한 태도는 공적 자금을 운용하는 자리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양심마저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국민연금은 단순한 자산 운용 기관이 아니다. 노후를 책임지겠다며 국민에게 저축을 강요해서 만든 자산이다. 자기 자산을 스스로 운용할 헌법적 기본권을 제한하면서까지 연금 제도를 만들어놓고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밝히지 않는다면 이는 국민과의 계약 파기이자 배신이다.


투명성이 유일한 정당성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다. 국민연금이 진정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기 위해선 불투명한 구조를 검증하고 개혁해야 한다. 이런 ‘깜깜이 운용’을 국민이 감내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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