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70)살기 위한 고투

  • 김영권 작가
2025.09.22 03:02:36 호수 1550호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야, 그럼 왕창 빠진다면 여태껏 누가 안 나가고 있겠냐?”

“근데 형은 그렇게 고생하고도 또 도망칠 자신 있어?”

“남말 하고 있네. 그러니까 뒈질 각오한다는 거 아니냐? 그리고 누군 뭐 틈틈이 연습 안 하는 줄 아냐?”

새벽 3시

“그랬군.”


“하여튼 그날 물 빠지는 시간은 새벽 3시쯤부터니까 각오 단단히 해둬.”

“알았어.”

“죽기 아니면 살기지 뭐.”

둘은 그날을 대비해 작전 계획을 세웠다. 작업 때마다 주는 밀빵을 탈출 3일 전부터는 먹지 말고 모아둔다는 거였다. 탈출 직전에 먹기 위해서였다.

그날 새벽에 불침번들이 교대하는 것을 신호 삼아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물이 3시쯤부터 빠지기 시작하니 바닥이 충분히 드러나도록 30분 가량 기다리다가 나간다는 계산이었다.

“형, 그날 밤 화장실 가는 척하려면 런닝구와 팬티 차림 그대로여야 하는데…… 옷은 어쩔 거야?”

“그냥 그대로 나가지 뭐. 어차피 수영을 하려면 벗어야 하기도 하지만, 일단 마산포에만 도착하면 걸어 놓은 빨래 정도야 없겠니.”

“알았어.”

둘은 씩 웃으며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용운은 나뭇가지를 떠나 드넓은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푸른 새를 보았다. 그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용운은 그 새의 날갯짓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이젠 그 날갯짓이 무한한 자유만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고투라는 걸 안다. 그래도 그 고투를 사랑하고 싶다.’

용운은 독백하듯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왔다.

전날 아침부터 개간사업에 내몰려 전에 없이 고된 하루를 보낸 원생들은 자리에 눕기 무섭게 코를 골았다. 용운은 밀약대로 3시까지 잠들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하기야 잠이 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심정이 착잡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좀 우습긴 했지만, 엉큼하고 무지막지하던 백곰 반장이 탈출 방법을 알려 준 것도 콧날을 찡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그 허약한 박꽃 누나를 지켜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백곰의 부탁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건 오히려 용운의 마음에 어떤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너 같은 쌍놈 따위가 어떻게 그 고운 누나를 사랑한단 말이야! 썩 꺼져 버려!’

반감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양가감정 속에서 용운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미 그 누나는 정신줄을 놓았고 백곰 반장은 사라져 버렸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용운은 남몰래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반감과 고마움이 교차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누나, 미안해요. 나 혼자 도망치려 한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여기서는 더 어쩔 수가 없어요. 엄마보다 더 좋아한 누나…… 그 포근한 가슴 속에 안겨 꿈을 꾸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안 돼요! 이제 가야만 해요! 여기 있다가는 죽고 말 테니까요. 하느님, 고운 우리 누나를 좀 지켜 주세요…… 슬프고 예쁜 누나야, 난 가야 해. 하지만 나 혼자만 살겠다고 가는 건 결코 아니에요. 믿어 줘요…… 누나, 잘 있어. 언젠가 꼭 다시 와서 누나를 데려갈게.’

벽시계가 세 번을 쳤다. 용운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자 불침번이 물었다.

“뭐여?”

“변소 좀 갈라구요.”

“빨리 갔다 와.”

불침번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예.”

용운은 짐짓 급한 듯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생경한 공기가 코를 통해 폐 속으로 들어왔다.

밖은 지독한 안개로 휩싸여 있었다. 가뜩이나 그믐이라 어두운데 안개까지 끼다 보니 발 아래조차도 분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야, 빨리빨리 움직이자.”

초조한 모습으로 기다리던 피에로가 장애물에 부딪칠세라 손으로 안개 속을 휘저으며 앞서 나갔다.

이미 초여름이었지만 밤안개는 몸을 으스스하게 휘감았다. 마음은 급하고 안개 속을 더듬어 나가는 건 힘이 들었다.

그때 용운의 발에 뭔가 텅 소리를 내며 부딪히더니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고 이어 양철통이 굴러가며 요란스런 소리를 냈다.

잠귀 밝은 셰퍼드가 컹컹 짖어댔다. 특별히 훈련된 그놈은 불침번이 나오도록 계속 컹컹 목청을 울렸다.

다급해진 탈출자들은 발을 헛디뎌 도랑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고, 갑자기 눈앞을 막아서는 나무나 기둥에 몇 번이나 부딪칠 뻔도 했다.

“형, 어쩌지?”

“음, 좋아! 토끼는 놈이 어려우면 잡으러 오는 놈들도 어렵겠지. 흐흐.”

웅덩이를 잘못 디디고 넘어질 듯 휘청거린 피에로가 오기 띤 소리로 씨부렸다.

그때 바로 뒤쪽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침번이 외치는 소리도 좀 멀리서 들려왔다.

“멈춰라! 거기 서! 발사한다!”

둘은 헉헉거리며 뛰었다. 이윽고 눈앞에 바다가 희뿌옇게 보였다.

“형, 어떡할까?…… 저 콜타르 같은 지옥 바다를 과연 건널 수 있을까?”

“안 가면 죽어. 가는 데까지 가보자구. 흐흐.”

“안 가면 죽어”

피에로가 개펄로 내려서며 말했다.

앞은 희미했지만 발 밑으로 개펄이 밟히는 걸 보니 간조 때가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뒤에서 총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멀리서 떠들며 추격해 오는 소리도 희미하게 감지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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