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오후 2시쯤 아내의 권유로 8월2일부터 방영되고 있는 JTBC 주말 드라마 <에스콰이어> 1,2회 재방송을 시청했다. <에스콰이어>는 가장 극단적인 마음의 상처를 입고 소송이라는 이름의 치유를 선택한 이들과 이를 대리하는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펼치는 이야기다.
<에스콰이어>는 정의롭고 당차지만 사회생활에 서툰 어쏘 변호사 강효민과 실력만큼은 최고인 파트너 변호사 윤석훈이 주인공으로, 이들이 매회 사건을 풀어가면서 타인의 상처를 통해 사랑을 싹틔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2회 중간쯤 강효민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로스쿨 때 성범죄가 주제였던 첫 강의 날 교수님이 들어오자마자 뭐라고 하신 줄 아냐”며 “페니스, 버자이너, 삽입, 구강 섹스, 항문 섹스 이걸 세 번 반복하시더니 이 강의실에선 이런 단어에 감정을 넣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라. 이건 사건을 구분하기 위한 명사일 뿐이라고 강조했다"고 했다.
그 후 의뢰인은 강효민 변호사에게 챙피를 무릅쓰고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일을 다 털어놓았고, 결국 강효민 변호사가 변론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한참 동안 “이런 단어에 감정을 넣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라. 이건 사건을 구분하기 위한 명사일 뿐이다”는 대사가 필자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감정을 넣지도 무서워하지도 말라. 이건 사건을 밝히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는 말이 오버랩됐다. 살인사건 현장에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된 희생자를 조사하는 경찰에게 필요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위급 환자 몸에 칼을 대야 하는 의사도, “이런 상황에 감정을 넣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건 사람을 살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제대로 변론하기 위해 입에 담기 힘든 말이나 표현하기 애매한 단어에서 감정을 빼고 하나의 명사로만 인식해야 하고,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현장의 감식에서 감정을 빼고 하나의 행위로만 여겨야 하고, 환자를 살리기 위해 칼을 대는 수술대에서 감정을 빼고 하나의 수단으로만 생각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필자는 드라마 <에스콰이어>를 시청하면서 법조인, 경찰, 의사 같이 사람의 죄와 생명을 다루는 자야말로 자신의 업무에 감정을 넣으면 안 되다보니, 직업상 반복되는 특정 감정을 계속 겪으면서 일상생활에서는 특정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됐다.
산부인과 의사인 젊은 후배도 "주사에 의존해 아내와 성생활을 하는 데도 잘 안 된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감정을 죽이고 해야 하는 일은 주로 중요한 목표 달성이나 위기 상황에서 집중력과 효율을 높여야 하는 전문적인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감정을 지나치게 억누르면 무기력, 우울증 등 부정적인 심리적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 억제는 단기적으로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심리적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문제다.
드라마 <에스콰이어> 1,2회를 다 보고난 후 오후 5시30분엔 국민의힘 당 대표 후보들의 TV토론회도 시청했다.
필자는 토론회 시작할 때 진행자가 "이 토론회 시간엔 계엄, 탄핵, 특검 등 이런 단어에 감정을 넣지 말기 바란다. 이건 나라를 올바로 세우기 위한 하나의 결단이라 여기고 토론회에 임하기 바란다"는 화두를 던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랬다면 후보들이 90분 동안 윤석열 전 대통령과 전한길 논쟁에 이어 윤석열정부와 당의 잘못만 놓고 서로 다투지 않고, 미래 비전을 발표하면서 건설적인 토론회를 했을 것이다.
현재 국민의힘은 계엄, 탄핵, 특검 등으로 파산지경에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당 대표를 하겠다는 후보들이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TV토론회에서 다시 이런 단어를 소환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에스콰이어> 2회 대사에 나오는 교수 말대로 그런 단어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없애고 토론회에 임했어야 했다는 말이다.
정치인도 법조인, 경찰, 의사처럼 국민의 행복과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 특히 여야가 강대강 대치 국면에 있고, 정당 내에서도 내분이 있는 상황서 정치인은 나랏일을 하는 매 순간 감정을 없애고. 오직 국가와 국민만을 위한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감정 억제 부작용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정치인에게도 박수를 보낼 것이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정치인이 바로 극좌고 극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