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허균, 서른셋의 반란 (6)만남

2019.09.04 10:39:46 호수 1234호

눈길이 가는 시

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나리,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기시지요.”

“자리를 옮기다니. 뭐가 급하다고.”

“모처럼 부안에 들르셨는데 가만히 있을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판관 나리 모시려고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요.”

“허허 참, 번거롭게스리.”

밝혀진 홍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판이었다.

마지 못하겠다는 듯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찝찝한 기운에 몸을 움츠렸다.

그 사정을 알 리 없는 삼복이 급히 신발을 가지런히 하고 저만치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가볍게 끙 하는 신음을 내지르고 신발을 신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 따르기 시작했다.

“나리, 오시면 오신다고 먼저 기별을 주셨어야지요. 제가 이곳에 있는데 이곳을 그냥 스쳐 지나려 하셨습니까?”

“아무래도 저 놈 때문에 고생원에게 몹쓸 일을 시키는 것 같구려.”

앞서 가던 삼복이 그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서는 원망의 눈초리로 허균을 바라보았다.

“저 놈이.”


“정작 홍시 이야기는 나리께서 하셨으면서.”

“이 놈아, 홍시 하나 먹기로 이리 수고를 해야 하냐?”

둘의 이야기에 고생원이 끼어들었다.

“이 장마철에 웬 홍시 이야기입니까?”

삼복이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이, 그거 보란 듯이 으쓱해 했다.

삼복을 바라보던 시선을 고 생원에게 향하면서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고생원은 홍시가 무엇인지 모르시는가.”

대답 대신 멍한 표정으로 허균과 삼복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생원 나리,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거 말입니다, 이거.”


삼복이 자신의 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을 펴서는 가벼이 흔들었다.

“예라, 이놈아!”

허균의 웃음소리가 창공을 가르고 나자 고생원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나리, 그런데 매창이라고 아십니까?”

“매창, 글쎄. 한번은 들어보았음직한 이름인데.”

“한양 땅에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천하의 나리께서 잘 모르시다니…….”

허균이 헛기침했다.

“그래, 이 부안 땅에 그리 유명한 명기가 있었다는 말인가.”

“허허, 진짜 판관 나리께서 매창이란 기생을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말을 마친 고생원이 아쉽다는 듯 헛기침 해댔다.

“그런데, 매창이 왜?”

“소인은 판관 나리께서 객고를 푸시라고 기껏 공을 들여 매창을 준비시키고 있는데. 판관 나리께서는 아닌 모양입니다.”

“어허, 이 사람. 내가 언제 사람 가리는 것 보았나. 그저 고생원의 처사가 고마울 따름이지.”

둘의 농을 듣던 삼복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저만치 앞서나가면서 한마디 내질렀다.

“나리께서 찾으시던 홍시가 바로 매창이라는 기생입니다. 매창.” 

그다지 생소한 분위기는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방금 전 스스로 사정해버린 후유증 아니면 말로만 듣던 기생 매창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방안 풍경이 여느 기생의 방과는 조금 달랐다.

벽에 시를 적은 한지들이 죽죽 걸려 있는 모습이며 왠지 마음이 차분하면서도 조용해지는 느낌을 금방 감지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 있는 시를 보기 위해 다가갔다.

벽에 걸려 있는 많은 시들 중에 유독 허균의 시선을 사로잡는 시가 있었다.

고생원의 배려…매창 방에 들다
벽을 메운 시…촌은에 대한 애정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더라 

내 정령 술에 섞여 님의 속에 흘러들어 
구곡간장을 마디마디 찾아가며 
날 잊고 님 향한 마음을 다스리려 하노라 

기러기 산 채로 잡아 정들이고 길들여서 
님의 집 가는 길 역력히 가르쳐주고 
한밤중 님 생각날 제면 소식 전케 하리 

등잔불 그무러 갈 제 창 앞 짚고 드는 님과 
오경종 나리 올 제 다시 안고 눕는 님을 
아무리 백골이 진토 된들 잊을 줄이 있으리 

내 가슴 흐르는 피로 님의 얼굴 그려내어 
내 자는 방안에 족자 삼아 걸어두고 
살뜰히 님 생각날 제면 족자나 볼까 하노라-

시선을 떼어 옆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시로 주었다.
贈癸娘(증계량) 계량에게 주다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랑명)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라는 이름 들었는데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싯구와 노래 솜씨 서울까지 진동했지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무산 신녀가 삼청(三淸)에 내려온 듯하네 

*三淸(삼청) :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곳 

#(탄식할 희)贈癸娘(희증계량) 즐거이 계량에게 주다
桃花紅艶暫時春(도화홍염 잠시춘) 붉고 복스런 복사꽃 피는 봄은 잠시지만 
撻髓難醫玉頰嚬(달수난의옥협빈) 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되돌리기 어렵네
神女下堪孤枕冷(신여하심고침냉) 선녀라도 독수공방은 견디기 어려우니
巫山雲雨下來頻(무산운우하래빈) 무산 운우의 정 자주 나누세

*巫山雲雨(무산운우) :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고당부주(高唐賦注)》에 “시집가기 전에 죽은 적제(赤帝)의 딸 요희(姚姬)를 무산 남쪽에 매장한 때문에 무산의 계집이라 전해 왔다. 회왕이 그곳에 출유(出遊)하여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 한 신녀(神女)가 나타나, 무산의 계집이라 자칭했다. 드디어 그녀와 교합(交合)하고는 그곳에 관(觀)을 짓고 이름을 조운(朝雲)이라 했다.” 하였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촌은 유희경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소원한 관계도 아니었다.

그와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으나 서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주위 사람들의 입을 빌어 그의 인간 됨됨이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눈길이 가는 시

천민 출신이지만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의 진정성에 대해 허균도 은근히 찬사를 보내고는 했었다.

오로지 나라와 부모에 충과 효를 다하고 자신에게 엄격하기로 소문난 그가 결국 자신을 접고 파계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길에 매창이 있었다.

그 옆에 다정하게 걸려 있는 ‘증계량’과 ‘희증계량’이라는 시는 매창에 대한 촌은의 애잔한 정을 듬뿍 담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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