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현대건설 인수 좌초 위기

2010.12.07 09:49:36 호수 0호

수세몰린 ‘선장’ 현정은 “신대륙이 눈앞인데…”


나티시스서 대출받은 1조2000억원 성격 두고 논란
동양증권 투자한 8000억원의 조건 명확하지 않아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순항하는 듯하던 현대그룹호. 돌연 불거져 나온 자금 출처 논란 ‘암초’에 걸렸다. 이를 두고 채권단은 전방위 압박 ‘폭우’를 뿌려댔다. 여기에 현대차그룹의 매서운 역공 ‘토네이도’까지 더해지면서 현정은 선장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현대건설이라는 신대륙을 눈앞에 두고 좌초할 위기에 빠진 때문이다.

현대그룹이 현대차그룹을 제치고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던 현대건설 인수전은 뜻밖의 암초에 걸렸다. 현대그룹의 인수자금 내역을 두고 논란이 불거진 것. 논란의 핵심은 현대그룹이 제시한 인수자금 내역 중 프랑스 나티시스 은행에 예치된 1조2000억원의 성격이다. 당초 이 돈은 현대상선 프랑스법인이 이 은행에 예치한 자금으로 전해졌다.



증빙자료 제출
끝끝내 거부

재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현대상선 프랑스법인이 이 같은 거액의 현금을 해외에 예치하고 있다는 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의 실적 악화 탓에 채권단과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대상에까지 오른 데다, 현대상선의 총자산은 33억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현대상선이 이 같은 거금을 예금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해 투자유치나 차입 등으로 구한 돈일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의혹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다름 아닌 현대증권 노동조합이었다. 한 식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형국이다.
현대증권 노조는 “1조2000억원은 현대상선 경영권 방어를 위해 현대그룹과 지분계약을 한 넥스젠 캐피털로부터 빌린 돈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며 “만약 투기자본인 넥스젠과 옵션계약을 했다면 현대그룹에 매우 불리한 조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논란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채권단은 지난달 23일 현대그룹에 증빙자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대출받은 것”이라고 해명하는데 그쳤다.
이에 채권단은 지난달 25일 현대상선 프랑스 현지법인이 보유한 나티시스은행 예금 1조2000억 원의 출처에 대한 증빙자료를 28일까지 보완해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결국 이에 응하지 않았다.

현대그룹은 “양해각서(MOU) 체결 전에 대출계약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인수합병(M&A) 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법과 입찰규정에 명백히 위반된다”며 “위법한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이며 양해각서 체결 이후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현대그룹은 “적법하게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후에도 채권단이 아무런 근거 없이 양해각서를 맺지 않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라며 “(채권단은) 늦어도 법과 입찰규정에 명시된 시한인 29일까지는 양해각서를 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채권단 증빙자료 제출·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하라
수세적인 자세 취하던 현대차그룹  ‘매서운 역공’

채권단 역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현대건설의 주요 채권기관인 정책금융공사는 “지난 23일 나티시스은행 예금에 대한 대출계약서 등 증빙자료를 요청했지만 현대그룹이 제출하지 않아 채권단 협의회 차원에서 다시 요구한 것”이라며 “현대그룹이 자료 제출을 끝내 거부할 경우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할 수 있는지에 대한 법률적 검토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자금출처를 두고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지난 1일에는 현대그룹의 인수자금에 대한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동양증권이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에 재무적 투자자로 8000억원을 투자한 것과 관련, 풋백옵션 등 투자 조건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풋백옵션은 재무적 투자자가 주식 등을 약정된 시점에 약정된 가격으로 인수자(현대그룹)에게 되팔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정책금융공사는 지난 1일 “현대그룹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재무적투자자로 참여하고 있는 동양종금증권의 풋백옵션 의혹에 대한 사실 확인을 금융당국에 공식 의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서 동양종금은 현대건설 주식취득 2년9개월 이후 주식을 매도할 수 있는 권리를 현대상선과 협의키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이 동양종금에게 풋백옵션을 부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져 나왔다. 만일 동양종금이 재무적투자자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현대그룹과 풋백옵션 방식의 계약이 이뤄졌다면 논란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 인수합병 재무적투자자는 인수주식을 약정시점에 약정된 가격으로 전략적 투자자에게 되파는데, 이 때 인수자는 인수주식의 시가가 약정가격에 미달할 것에 대비해 자산을 담보로 제공하게 된다. 결국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주식을 담보로 동양종금으로부터 대출을 받은 것과 같다는 얘기다.

특히 되파는 시점에 약정 가격과 시가에 차이가 있으면 현대그룹이 담보로 제공한 회사 자산을 처분할 수밖에 없다. 무리한 인수합병에 따른 ‘승자의 저주’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입찰금액에 대한 동양종금의 사전위임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동양종금이 입찰일 주가대비 2배 수준으로 현대건설 주식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동양종금이 요구한 인수금액의 상한선이 현대그룹이 제시한 입찰금액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만일 현대그룹이 자의적으로 금액을 높였다면 컨소시엄 관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려 재무적투자자 지위가 유효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자금 출처를 중심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는 실정임에도 현대그룹은 증빙자료 제출을 끝내 거부했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과 채권단의 관계는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다. 결국 채권단은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증빙자료도 제출하고 재무구조개선약정도 체결하라는 전방위 압박을 하고 나선 것.

믿었던 외환은행
현대그룹 등 돌려

지난 2일 외환은행, 산업은행, 농협으로 이뤄진 현대그룹 채권단 운영위원회는 최근 현대그룹에 오는 6일까지 재무구조개선약정의 체결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행하지 않을 시 강도 높은 후속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채권단 관계자는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자금 5조5100억원 조달을 위해 막대한 차입을 했고 그만큼 리스크가 커졌기 때문에 약정체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현대그룹은 해운시황 회복 등으로 수익력이 좋아졌기 때문에 약정체결을 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18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현대상선 실적이 좋아졌기 때문에 재무개선약정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에 앞서 지난 1일 외환은행은 “오는 7일까지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하며 프랑스 나티시스 은행 예금과 관련해 내놓는 자료가 미흡하다고 판단하면 현대그룹 대신 현대차그룹이 예비우선협상자가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9일 외환은행은 채권단 합의를 앞두고 단독으로 현대그룹과 양해각서를 체결해 물의를 빚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외환은행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현대차그룹의 ‘역공’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현대차그룹이 주거래은행이자 매각 주관사인 외환은행에서 거액의 예금을 인출한 데 이어 직원 급여계좌를 다른 은행으로 바꾸는 등 압박을 가했다.

최근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이 외환은행에서 1조5000억원 이상의 예금을 찾아간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외환은행 계좌에 남아 있는 현대차그룹의 예금은 1000억~2000억원에 불과하다. 사실상 거의 모든 예금을 찾아간 셈이다. 이를 포함한 범현대가 기업들의 외환은행 계좌에 남아 있는 예금은 3000억~4000억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현대차그룹은 이날 현대차와 기아차 등 계열사 임직원들에게 외환은행에 급여계좌가 있는 경우 이를 이날 중 다른 은행으로 옮기고 회사에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금융권에서는 외환은행이 현대그룹과 현대건설 매매 양해각서를 맺은 데 따른 ‘보복성 조치’로 보고 있다. 외환은행은 현대차그룹의 ‘강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항복한 셈이다.

현대차그룹의 역공은 매서웠다. 인수전 내내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공격모드로 돌아선 현대차그룹의 기세는 그야말로 ‘토네이도급’이었다. 특히 인수전의 변수로 작용한 프랑스 나티시스 은행의 1조2000억원과 동양종합금융증권의 8000억원에 결정적 흠이 있다고 판단,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압박을 의식해서인지 현대그룹도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가처분 신청’을 접수했다.

수세 몰린 현대그룹
잡은 고기 놓칠 위기

현대그룹은 2일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현대건설 인수와 관련한 이의제기 금지 등을 요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고 밝혔다.
이번 가처분 신청에는 현대건설 인수와 관련한 허위사실 유포 등 명예 및 신용 훼손행위 금지, 주식매매계약 체결 방해행위 금지 등이 포함됐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이 매각주관사인 외환은행의 예금을 일방적으로 인출하고, 일부 언론이 보도한 대로 현대그룹의 재무적 투자자인 동양종합금융증권에 거래 단절을 위협하는 등의 방법으로 압력을 가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입찰 방해 행위에 해당한다”며 “현대차그룹은 이러한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현대건설 주식 매각주관사인 외환은행과 적법하게 체결한 양해각서의 효력을 부인하는 현대차그룹의 예비협상대상자 자격은 박탈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질세라 현대차그룹도 곧바로 “외환은행이 2차의 유예기간을 주는 건 불법”이라며 반격하고 나섰다.

현대차그룹은 2일 “외환은행이 현대그룹에 1차 자료제출 시한인 오는 7일 이후 재차 5일간의 유예기간을 더 주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며 “이러한 외환은행의 조치는 법률과 대법원 판례에 위반되는 불법조치”라고 밝혔다. 현대차그룹은 민법 제544조와 대법원 판례를 들며 “외환은행이 현대그룹에 추가로 5일간의 시간을 더 주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민법 제544조에 따르면 계약 당사자가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상대방은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그 이행을 최고하고 그 기간 내에 이행하지 아니한 때에는 계약을 해제하여야 하지만, 채무자가 미리 이행하지 아니할 의사를 표시한 경우에는 최고를 요하지 아니하고 그 즉시 해제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현대그룹이 대출계약서를 포함한 서류를 제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라면서 “외환은행의 1차 조치와 별도로 2차 유예기간을 더 준다면 이는 명백한 불법조치이며 법률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금 출처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인수전에서 현대그룹의 손을 들어준 채권단마저 현대차그룹의 전방에서 인수전을 뒤흔들고 있다.
여기에 현대차그룹의 역공까지 더해지면서 현대그룹은 수세에 몰렸다. 현 회장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치게 될 위기에 처한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제2차 인수전에서 어느 쪽이 승리를 거머쥘지는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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