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유학 10년 허와 실

2010.05.11 09:24:30 호수 0호

‘기러기 아빠’의 ‘꿈’은 어디로…


조기유학 붐이 시작된 지 10년째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밀레니엄 시대가 되면서 조기유학은 글로벌인재 양성의 초석이라는 희망 속에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조기유학 붐은 한풀 꺾인 모양새다. 조기유학을 선도했던 강남지역에서도 초, 중고생의 해외유학이 몇 년째 감소하고 있다. 조기유학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고 있는 까닭이다. 조기유학 10년을 되돌아봤다.


조기유학 붐 10년, 각종 부작용으로 유학생 수 내림세
외로운 기러기 아빠, 적응 못하는 어린 유학생 등 부작용


자영업을 하고 있는 이모(42)씨는 5년째 기러기아빠 신세다. 5년 전 아들이 6살이 됐을 때 아내와 아들을 캐나다로 보냈기 때문이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영어권 나라에서 공부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아내의 고집으로 이씨는 울며 겨자먹기로 홀아비신세가 됐다. 처음엔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어 기러기 아빠 생활이 좋기만 했다는 이씨. 하지만 자유는 이내 외로움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돈 버는 기계라는 생각만이 이씨를 괴롭혔다.

외로운 ‘돈 버는 기계’



더 큰 문제는 아들과의 관계였다. 어린 나이에 외국생활을 경험한 아들은 사고방식이나 생활패턴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이 점은 이씨와 아들의 거리를 멀게 만들었다. 이씨는 “유학을 떠난 뒤 3년 만에 아들과 만났는데 나와는 대화조차 되지 않았다”며 “부자지간의 정을 쌓아야 할 유년기에 아버지와 떨어져 지낸 것이 그토록 장벽을 만들 줄은 몰랐다”고 토로했다.

또 한 가지 이씨를 괴롭히는 것은 아내에 대한 불안감이라고 한다. 아내와 자식을 외국으로 보낸 남성들 가운데 아내의 외도로 고민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본 이씨는 어느 순간 아내에 대한 믿음이 불신으로 바뀌었다. 무용을 전공한 이씨의 아내는 캐나다에서도 무용 강사를 하며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어 더욱 불안하다고 한다.

외국으로 보내줘야 할 생활비도 이씨에겐 큰 부담이다. 5년 전만 해도 부담 없이 돈을 보내줄 수 있었지만 사업이 점차 기울면서 매일 환율을 검색하는 것이 일이 됐다고 한다. 이씨는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 돌아오면 5년간의 유학생활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다”며 “만약 지금 기러기 아빠가 되려는 사람이 있다면 말리고 싶다”고 말했다.

조기유학 붐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면서 각종 부작용도 하나 둘 드러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이씨의 사례가 말해주듯 기러기 아빠들의 문제다. 외로움과 경제적 부담감, 서먹해지는 부부관계, 자식과의 장벽 등 기러기 아빠들은 각종 문제들을 떠안고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각한 경우 자살을 고민하기도 한다. 지난 2008년에는 아내와 자식을 외국으로 보냈다가 이혼을 당하고 자살을 한 기러기 아빠의 사연이 알려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경남지역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A씨는 2001년 경 조기유학을 위해 아내와 아들, 딸을 외국으로 보냈다. 가족에게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A씨. 하지만 A씨에게 돌아온 건 아내의 이혼통보였다. 이에 절망하던 A씨는 결국 잘못된 선택을 했다. 자신이 살던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한 것. 그가 남긴 유서에는 ‘당신 없이 살 자신이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집에서 사망한 후 며칠 동안 시신이 방치된 기러기 아빠의 사연도 있었다. 홀로 기러기 아빠로 지내던 회사원 B씨는 3년 전 자신의 집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B씨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사망소식이 외부에 알려질 길이 없어 그대로 시신이 방치될 수  밖에 없었던 것. B씨의 죽음은 사망한 지 사흘 후 친척을 통해 알려졌다.

조기유학의 부작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에 남겨진 아버지만큼 외국으로 간 아이들과 아내도 외국생활 부적응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인종 간, 가족 간 갈등이 이들을 괴롭혔다. 지난 2007년 기획예산처가 현대리서치연구소를 통해 미국·캐나다 등 영어권 국가에 자녀를 조기유학 보낸 부모를 대상으로 심층 조사를 해 내놓은 ‘조기유학 관련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일부 학부모들은 “중·고교생 등이 외국에서 조기유학을 하면 인종갈등의 문제를 인식하고 한국출신 학생들끼리 어울리고, 이럴 경우 영어실력이 늘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조기유학 중인 중·고생들은 영어실력 부족으로 과학·사회 등의 과목에 대한 이해가 떨어져 학교수업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게 돼 유학초기에는 영어 과외, 나중에는 영어·수학·과학 등에 대한 과외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러기 엄마’들 역시 언어소통의 어려움으로 자녀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커져 자녀들과 갈등을 빚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물론 조기유학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2000년 이후 조기유학을 간 15만 명의 학생들 가운데에는 해외 유수 명문대에 진학하거나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룬 학생도 적지 않다. 하지만 성공적인 유학생활을 하지 못한 학생 가운데는 학업에 흥미를 잃거나 탈선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다보니 조기유학생과 단기 어학연수생 중 절반은 국내로 돌아오고 있다. 이렇게 귀국한 학생들은 다시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어 이중고를 감당해야 한다.

이 같은 부작용은 조기유학 학생 수의 감소로 표면화되고 있다. 조기유학의 메카인 강남권 초, 중학생들의 해외 조기유학생(미인정 유학) 숫자가 4년 내리 감소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육개발원과 서울시교육청의 ‘2006~2009년 초중교 해외 유학생수’에 따르면 서울 강남(강남·서초구)의 초·중교 미인정 유학생은 2006년 2517명에서 2007년 2336명, 2008년 2282명, 2009년 1614명으로 점차 줄었다.

해마다 줄어드는 유학생

초등학생은 2006년 1270명에서 2007년에는 1149명으로 줄고, 2008년 1250명으로 조금 늘었다가 2009년 1064명으로 다시 감소했다. 중학생은 2006~2008년 각각 1247명, 1187명, 1032명으로 조금씩 줄다가 2009년에는 550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서울지역 전체 집계에서도 2006~2008년 사이 초·중학교의 조기유학생은 8407명에서  7468명으로 줄었고, 고교 유학생(인정유학)도 2483명에서 1994명으로 줄어들었다.

한 교육전문가는 “확고한 의지나 목표 없이 붐을 타고 조기유학을 떠난 학생들은 십중팔구 실패할 수 밖에 없다”며 “어떤 교육이든 유행에 이끌려 선택하는 것은 자녀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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