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뒷담화>성공신화 주인공 초라한 현주소

2009.07.07 09:20:12 호수 0호

제 잘난 맛에…“회사 나가면 개고생”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모 대기업의 광고 카피다. 다소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이 카피는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빨리 기억되는 효과로 화제를 모았다. 뿐만 아니라 이직을 고민한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떠올릴 만한 문구이기도 하다.

‘회사 떠나면…’이란 전제만 바뀐 의문이다. 고용 시장은 요즘 취업 한파의 여파로 ‘안전빵’인 잔류 쪽에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무턱대고 ‘둥지’를 떠났다가 낭패를 보기 십상인 이유에서다. 한때 조직에서 ‘스타’ 대접을 받다 ‘제 잘난 맛에’자리를 옮기거나 창업한 재계 철새들의 초라한 현주소가 이를 뒷받침한다.

중견그룹 부장으로 재직하던 박모씨는 지난해 말 사직서를 내고 신생 벤처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벤처회사는 파격적인 대우를 내세웠다.
‘전 연봉의 2배 책정, 임원급으로 직급 상향 조정, 일정 주식 부여, 1인 사무실 배정….’
박씨를 유혹한 계약 내용이다.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남부럽지 않게 승승장구했지만 벤처회사가 내민 스카우트 조건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바로 사인했다.

둥지 등진 기업스타들 ‘낙동강 오리알’ 찬밥 신세
“이름값 못하고…” 졸지에 갈곳 없는 백수로 전락


박씨는 “재계에서 알아주는 명색이 중견그룹에서 서운한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워낙 좋은 대우를 약속해 무조건 낫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씨는 현재 ‘백수’신세다. 올 초부터 벤처회사로 출근했지만 6개월도 못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주식은 휴지조각이 돼 버렸고 마지막 달 월급은 받지도 못했다.

아군서 적군으로



그저 매달 100만원가량 나오는 실업급여로 근근이 생활을 꾸리고 있다. 그나마 벤처회사 퇴사 당시 근무일수가 1년을 채우지 못해 3개월밖에 보장되지 않는다. 다시 취업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한번 박차고 나온 바늘구멍은 쉽게 열리지 않고 있다. 박씨는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모 대기업의 광고 카피를 접할 때마다 자신의 처량한 처지와 겹쳐 씁쓸하다.

이처럼 ‘제 잘난 맛에’자리를 옮기거나 창업했다가 본전도 못 건진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한때 조직에서 핵심 인력으로 ‘스타’ 대접을 받던 재계 인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자신의 이름만 믿고 여태 키워준 둥지를 떠났다가 졸지에 미아 신세로 전락하기 일쑤다. 심지어 라이벌인 경쟁사로 말을 갈아탔다가 경주는커녕 마방에 꼼짝없이 갇힌 꼴도 눈에 띈다.

A씨는 화장품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다. 불과 십수년 만에 무일푼에서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은 그의 성공 신화는 사내는 물론 업계와 언론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았다. A씨의 성공스토리는 자서전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사실 A씨가 신화적 존재로 군림한 배경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회사의 막후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업무보다 사내 교육 또는 대관업무 등 대외홍보에 집중하도록 배려한 것. 한마디로 A씨를 ‘우상화’한 결과다.

하지만 A씨는 변심했다. 직급·연봉 등을 놓고 오너와 갈등을 빚은 뒤 “내 회사를 갖고 싶다”는 충동에 회사를 뛰쳐나와 동종업의 다른 업체를 차렸다.
창업 초반엔 주목을 받았다. 단지 ‘성공 신화의 주인공인 A씨가 경영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도 잠시. 언론에선 그의 소식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회사 매출도 생각대로 오르지 않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A씨의 성공 신화는 결코 혼자 저절로 이뤄낸 것이 아닌 철저한 회사의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며 “이런 까닭에 또 다른 신화를 꿈꾸던 A씨는 둥지를 떠난 뒤 더 이상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B씨의 사정도 비슷하다. 모 프랜차이즈 사장과 사실상 동업자 관계로 수년간 동고동락하면서 온갖 고생 끝에 빛을 발할 즈음 큰 결단을 내렸다. 회사와 같은 영역에 다른 깃발을 꽂기로 한 것.

회사 입장에선 배신이었다. 믿었던 ‘아군’이 하루아침에 ‘적군’으로 바뀐 것이다. 더구나 경영 전략 등 회사의 기밀사항을 B씨가 속속들이 알고 있는 탓에 경영진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B씨의 회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졌다. 상호와 메뉴, 계약자 모집 등 모든 면에서 전에 몸담았던 회사를 모방했지만 소비자를 잡는 노하우까지 따라하지 못했다.

이도 모자라 B씨는 최근 역시 동종업의 다른 업체로 들어가기 위해 ‘입질’ 중이란 후문이다. 업계에선 B씨가 라이벌사로 골인하면 ‘고향사’를 씹어댈 게 불 보듯 뻔하다는 혀 차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대기업에서도 이런 대략 난감한 광경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C씨는 국내 굴지의 그룹에서 오너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지근거리에서 보좌할 만큼 핵심 가신으로 꼽혔지만 역시 자신의 이름만 믿고 창업한 회사가 비틀거리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D씨는 고액 연봉과 승진의 미끼를 덥석 물어 20년 동안 정든 그룹을 떠나 다른 그룹사 CEO 자리에 안착했지만 경영 실적이 좋지 않아 임기 중 해외 지사로 발령 나는 수모를 겪었다. 

돈만 보고 ‘쪼르르’

소위 ‘잘나가던’ 대기업 임원으로 있던 E씨도 모 그룹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여 이직을 결정했지만 자리를 빼앗긴 기존 ‘토종맨’들의 집단 항명에 재임 내내 한숨만 내쉬다 결국 스스로 물러났다.

재계 관계자는 “조직이 있어야 내가 존재한다는 기초적인 인식을 간과한 채 ‘나부터’란 얄팍한 생각으로 회사를 떠났다간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며 “새로운 조직에 몸을 담은 이들은 한때 자신의 명성만 믿고 버티는 경우가 많은데 그곳도 마찬가지로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 하는,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경제 정글’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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