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격토로> '신격호 애타게 찾는' 부산 아지매 사연

2013.07.08 11:36:04 호수 0호

"회장님 꼭 한번 만나야 합니다"

[일요시사=경제1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을 애타게 찾고 있는 한 아주머니가 있다.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묻어난다. 지난 10년간 편지도 수차례 보냈다. 신 총괄회장 별장에 찾아가기도 했다. 평범한 아주머니가 재계 5위 그룹 총수를 찾는 이유는 뭘까.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님을 만나야 합니다. 꼭 전해야만 하는 물건이 있습니다."



부산 연제구 거제2동에 거주하는 평범한 가정주부 김명숙(62)씨의 간절한 소망이다. 김씨는 지난 10여 년간 신 총괄회장을 만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한번도 마주하지 못했다.

김씨에 따르면 이들의 인연은 신 총괄회장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어져왔다. 신 총괄회장의 부친 고 신진수씨와 김씨의 부친 김진태씨가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

"신 총괄회장의 집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며느리(신 총괄회장의 첫째 부인 노순화 여사)가 많이 아팠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치료를 해 주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당시 제 부친은 동네에서 부유한 축에 속했습니다. 자가용과 함께 운전기사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제 부친은 종종 그 집의 며느리를 태워 병원 통원을 시켜줬습니다."

부인 남겨두고
나홀로 일본행

신 총괄회장은 1922년 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빈농 신진수·김필순씨의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35년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신 총괄회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1년 뒤인 36년 면장을 지낸 큰아버지 신진설씨의 도움으로 간신히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학업성적은 신통치 못했다. 또래에 비해 덩치는 별로 크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으며 신중한 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습학교 졸업 후 그는 백두산 밑에 있는 '명천국립종양장'의 연구생으로 1년 동안 있었다.

18세가 되던 40년 신 총괄회장은 같은 마을의 노순화 여사를 아내로 맞아 결혼하고 경남 양산에 있는 경남도립종축장의 기수보로 직장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직장 부근에서 혼자 하숙을 했다. 이때 그는 일본으로 밀항할 생각을 품었다. 이듬해 신 총괄회장은 돈도 벌고 못다한 공부를 더하기 위해 단돈 83엔을 쥐고 홀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얼마 뒤 장녀인 신영자 롯데장학복지재단 이사장이 태어났다.

도쿄에 도착한 신 총괄회장은 스기나미에 있는 연립주택의 다다미방 하나를 빌려 자취생활을 하고 있던 고향친구들과 함께 기거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우유배달을 했고 대학진학을 위해 와세다 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원래 문학 전공을 꿈꾸던 신 총괄회장은 와세다공업고등학교(현 와세다대학 이학부) 야간부 화공과에 적을 뒀다. 문학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각에서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시각도 있다. 당시는 전쟁준비를 하던 때라 실업계 학교에 지망해야 징병을 면할 수 있었다.

신 총괄회장에게 첫 사업기회는 한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전당포와 고물상 주인 일본인 하나미쓰 노인이 매사에 성실했던 신 총괄회장을 눈여겨 보면서 시작됐다. 44년 어느 날 하나미쓰는 신 총괄회장에게 자신이 전액 출자(6만엔)한다는 조건으로 군수용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제조공장을 차릴 것을 제의, 이를 받아들인 신 총괄회장은 도쿄 아오모리에 공장을 임차해 사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공장은 미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신 총괄회장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두 집안 부친 신진수-김진태 절친 사이 인연
일본 밀항후 한국에 남은 본부인·장녀 돌봐

친구들은 신 총괄회장에게 귀국할 것은 종용했지만 46년 신 총괄회장은 도쿄 스기나미구의 낡은 창고에 '히라끼 특수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커팅오일을 응용해 만든 비누와 포마드 등 유지제품을 생산·판매해 1년 반 만에 차입금 6만엔을 전부 상환했다. 전쟁 직후 생필품이 귀했던 일본의 상황 덕분이었다.

기세를 몰아 신 총괄회장은 추잉껌 제조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풍선껌은 비행기의 창유리를 녹인 초산비닐수지에 송진과 도료인 가소제를 섞은 것을 가마솥에 넣어 녹인 후 여기에 사카린과 향료 등을 추가해 만들었다. 원료는 통제를 받지 않아 얼마든지 확보가 가능했고 가마솥과 칼만 있으면 껌의 제조가 가능했다.

신 총괄회장은 47년 약제사 1명을 고용하고 수동식 기계를 설치 2엔짜리 풍선껌을 만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대박. 신 총괄회장은 48년 롯데를 설립했다. 신 총괄회장이 감명 깊게 읽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이름을 따왔다. 신 총괄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신 총괄회장은 당시 최고스타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광고모델로 사용하고 2엔짜리 껌에 1000만엔의 상금을 거는 이벤트를 실시하는 등 탁월한 마케팅능력을 발휘, 롯데 껌으로 일본 껌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그러던 중 신영자 이사장을 홀로 키우던 노순화 여사가 51년 2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신 총괄회장의 첫째부인은 원래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신 총괄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저희 집에 부인 병간호를 부탁했고 약 3년 정도 아버지가 철도병원까지 입원 및 통원 치료를 도왔습니다."

신 총괄회장은 52년 일본인 다케모리 하쓰코씨와 재혼했다. 당시 일본 외무성 대신의 여동생으로 결혼 후 남편성을 따 시게미쓰로 바꿨다. 신 총괄회장의 일본 이름은 다케오 시게미쓰다. 2년 뒤인 54년 신동주 일본 롯데그룹 부사장이, 55년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태어났다.

남편 성공 못보고
쓸쓸히 눈 감아

56년 세계 최대 껌 메이커인 미국 리글리가 일본에 상륙하면서 신 총괄회장은 위기를 맞았지만 10여 년간의 사투 끝에 껌 전쟁은 롯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신 총괄회장은 껌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59년 3월 자본금 2000만엔의 롯데상사를 설립하고 61년부터는 초콜릿 제조사업에 착수했다.

당시 일본 초콜릿 시장은 메이지제과와 모리나가제과가 석권하고 있었다. 후발업체인 롯데는 이들을 능가하기 위해 유럽에서 손꼽히는 초콜릿 제조기술자와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설비를 확보했다. 64년부터는 'VIP초콜릿'이라는 상표로 시장공략에 나섰고 68년 롯데는 연매출 700억엔에 종업원 3000여 명의 일본 최대 종합과자 메이커로 성장했다.

롯데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부터였다. 이후 국내 일본 자본 진출이 늘었고 이를 계기로 신 총괄회장도 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하면서 고국에 진출했다.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로 한국에 진출한 신 총괄회장은 초기 형제 간 골육상쟁을 겪었다.

"3년간 입원
치료 도왔다"

신 총괄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인 철호씨는 59년에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을 설립하고 넷째 동생 춘호씨와 함께 껌과 캔디, 비스킷, 빵 등을 생산했다. 그러던 중 신 총괄회장이 모국 사업발판 마련을 목적으로 ㈜롯데와 롯데공업을 정리하려 하자 동생들이 크게 반발한 것. 하지만 결국 철호씨는 캔디와 비스킷 부분을 떼내어 '메론제과'를 설립하고 춘호씨는 '롯데공업'을 차려 라면시장에 진출했다. 이후 춘호씨는 신 총괄회장에 의해 '롯데'라는 상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완전한 독립을 하고 ㈜농심을 설립했다.

신 총괄회장은 71년 껌 국내 생산을 개시하고 73년 기업공개 및 상장을 했다. 이후 한국 롯데그룹은 급속하게 성장해 현재 국내 재계 순위 5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73년 당시 발행가 500원이던 주가는 2013년 현재 160만원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76개 계열사를 소유, 일본 롯데보다도 사업 규모가 더 커지게 됐다.


김씨는 신 총괄회장이 한국에 들어와 자신의 가족들을 찾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신 총괄회장이 우리 가족을 찾았는데 65년 제 부친이 돌아가시고 연락할 길이 없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롯데그룹 쪽에 수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내고, 신 총괄회장의 별장에서 잔치가 열릴 때마다 '신격호 회장을 만나야 합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만들어 찾아가기도 했지만 여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씨가 공개한 A4용지 2장 분량의 편지는 "울주군 삼동면 본리 562번지 고 김진태씨 자녀입니다"로 시작, "신 회장님이 우리 가족을 찾았다는 데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다보니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연락처를 알려드리며 만나뵙기를 원하옵니다"라고 적혀있다. 편지와 함께 김씨의 아버지인 고 김진태씨의 흑백 사진도 첨부돼 있다.

신 총괄회장은 매년 5월 고향 울주군 둔기리의 호숫가 앞 잔디밭에서 사재를 들여 잔치를 벌이고 있다. 69년 대암댐 건설로 고향마을이 물에 잠기자 전국에 흩어진 고향사람들을 수소문해서 모았고 71년 돼지머리에 막걸리를 기울이며 시작된 잔치는 지금껏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있다.

신 회장 일본 가면서 부인 간호 부탁
신영자 홀로 어렵게 키우다 세상 떠나

모임 이름도 마을 이름을 따 '둔기회'라고 지었다. 롯데 측은 둔기회 회원들을 관리하며 매년 잔치에 모이도록 연락을 하고 있다. 수십명이던 회원수는 회원들의 자손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1000여 명을 훌쩍 뛰어넘었다.

지난 5월6일 열린 제43회 둔기회에도 전국 각지에서 1000여 명이 몰렸다. 장기자랑과 딱지치기, 제기차기 등 추억의 놀이 체험이 이어졌고 어린이들을 위한 비눗방울 공연도 마련됐다. 신 총괄회장은 인근 별장에서 친지들과 담소를 나눴다.

"신 회장님이 탄 것으로 보이는 차가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제 옆을 지나쳤지만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신 회장님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든 알려져 부친의 유지를 받들 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씨가 신 총괄회장을 만나려는 이유는 오직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신 회장님에게 전하라는 물건이 있습니다. 내용물은 밀봉 상태로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유언
받들고 싶다"

신 총괄회장은 지난해 11월 일본에 있는 가족과 지인을 만나기 위해 출국했다가 12월 귀국한 뒤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에 마련돼 있는 집무실 겸 숙소에 머무르고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편지를 수차례 보냈다고 하는데 그룹 쪽에는 관련 편지가 도착한 적이 없다"며 "또한 지난 5월 잔치에서 신 총괄회장은 차를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이동해 만일 플래카드를 들고 잔치를 찾았다면 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신 총괄회장 비서실에는 일주일에 몇 건씩 비슷한 내용의 전화가 온다"며 "전달할 물건을 비서실을 통해 전달하면 그룹 측에서 확인하고 조치를 취하겠다"고 덧붙였다.

"부친 유언 따라 전해줄 물건 있다"
롯데 "비서실 통해 전달하면 조치"

신 총괄회장의 맏딸 신 이사장은 롯데쇼핑 사장을 맡고 있다. 부산여고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나와 신 총괄회장이 국내에 진출한 67년 장오식 전 선학알미늄 회장과 결혼해 1남3녀를 뒀다. 장남 재영씨는 재계에서 은둔의 재벌 3세로 통한다.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며 이렇다 할 그룹 경영 활동이 전혀 없다. 맏딸 혜선씨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둘째딸 선윤씨는 화장품 전문업체 블리스를 이끌고 있으며 롯데백화점 에비뉴엘관 오픈을 진두지휘한 인물로 유명하다. 막내딸 정안씨는 2004년 영국계 로펌 클리포드&챈스의 이승환 변호사와 결혼했다. 이 변호사는 한국케이블TV대구방송 회장과 영남일보 주필을 지낸 이종명씨의 아들이다.

신 이사장은 새어머니인 시게미쓰 여사와는 팔짱을 끼고 다닐 정도로 사이가 좋다. 친어머니 노순화 여사의 제사는 신동빈 회장이 한국에 정착한 이후 매년 꼬박꼬박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