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재난적 의료비 지원금이 올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재난 수준’으로 재정 지출이 치솟은 셈이다. 표면적으로는 지원 범위가 확대된 영향으로 보이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말이 나오는 중이다.
재난적 의료비 제도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의료비 지출로 가계가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돕기 위해 도입됐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도 감당되지 않는 고액 의료비 문제가 반복되면서, 정부가 직접 의료비 일부를 지원하는 방식의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재난적 의료비 제도가 논의되기 시작한 배경에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된 고액 의료비 부담 문제가 있었다. 당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이 단계적으로 추진돼왔지만, 실제 진료 현장에서 발생하는 비급여 항목과 고액 치료비는 여전히 가계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암이나 희귀질환처럼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질환은 물론,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시술·검사 비용이 수백만 원 단위로 누적되면서 가계가 단기간에 경제적 위기에 처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심지어 의료비 부담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거나, 장기 입원비로 인해 가족 전체의 생계가 흔들리는 경우까지 생기면서 “건강보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며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당시 한국의 의료비 구조는 국제 기준으로도 높은 수준이었다. 2017년 기준 경상의료비 중 가계가 직접 부담하는 비율은 33.7%로, OECD 평균(20.5%)보다 크게 높았다. 가계가 의료비를 직접 지출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은 질병이 발생할 경우 중산층 이하 가구는 곧바로 생활 기반이 흔들릴 위험이 크다는 의미였다.
이유는 2010년대에 들어 비급여·고액약제 사용이 늘면서 의료비 지출은 더욱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국민의료비 연평균 증가율이 상승함과 동시에 민간 실손보험 가입이 급증하는 현상도 함께 나타났다.
실손보험 의존도가 높아진 것은 건강보험 보장성만으로는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방증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결국 의료비와 가계 부담 사이의 격차가 커지면서 고액 치료비로 경제적 파탄에 이르는 사례가 반복적으로 지적됐고, 의료비로 인해 사회적 취약계층이 양산되는 현상도 문제로 떠올랐다.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정부는 의료비 부담 완화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공공적 안전망 도입 필요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특히 암 등 중증질환 환자들이 비급여 비용과 고액 입원비로 인해 빈곤선 아래로 떨어지는 사례가 여러 차례 보고되면서, 제도 도입에 힘이 실렸다.
건강보험으로도 한계가 있는 영역을 메우기 위해 정부가 직접 의료비 부담을 보조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 재난적 의료비 지원 사업이다. 논의는 먼저 시범사업 형태로 나타났다. 2013년 보건복지부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 제도를 제한적으로 운영하며 고액 의료비로 어려움을 겪는 가구를 선별 지원했다.
당시는 암과 같은 중증질환을 중심으로 제한적 지원이 이뤄졌지만, 시범사업이 실제로 의료비 부담 경감에 기여한다는 평가가 이어지면서 제도화를 위한 논의가 본격화됐다.
병원은 지원금 신청 적극 홍보
경증 지원이 중증 지원 넘어서
이후 2017년 정부가 발표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 이른바 ‘문재인 케어’에서도 의료비 부담으로 인한 가계 위기 문제를 줄이기 위한 방안이 주요 과제로 제시됐고, 재난적 의료비 지원을 제도적으로 확장할 필요성이 함께 언급됐다.
결국 이 같은 논의를 토대로 2018년 ‘재난적의료비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시행되면서 재난적 의료비 지원이 국가 제도로 공식화됐다. 법률 시행을 계기로 지원 근거가 명확히 규정되고, 지원 대상·소득 재산 기준·심사 절차 등이 체계적으로 마련되며 지금의 사업 구조가 형성됐다.
사업의 기본 골자는 단순하다. 가구 소득과 비교해 의료비 부담이 지나치게 클 경우 정부가 의료비 일부를 대신 부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는 도입 초기부터 실질적인 이용률이 낮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2018년 본격 시행 당시 소득과 재산 기준은 상대적으로 엄격했고, 지원 대상 질환도 암·심장질환·뇌혈관질환·희귀질환 등 중증 중심으로 제한됐다.
입원 진료는 질환 구분 없이 신청이 가능했지만 심사 기준이 높아 실제 지원 문턱이 상당히 높다는 평가가 많았다. 더불어 기준중위소득 100% 이하 가구 등 저소득층만을 중심으로 지원하다 보니 대상 폭이 좁았다.
문제는 신청률 자체도 매우 낮았다는 점이다. ‘재난적 의료비’라는 제도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환자가 많았고, 병원에서의 안내도 충분하지 않았다. “홍보가 부족해 실수요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서류 제출 절차 역시 까다로워 환자가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자료가 많았고, 의료기관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을 경우 신청까지 하기는 쉽지 않았다.
기준 완화
지원 폭증
이 같은 문제 제기가 이어지자 정부는 기준을 단계적으로 완화하는 보완책을 마련했다. 2021년을 전후해 재산 과세표준 기준이 약 5억원대로 설정됐고,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의 지원 비율이 80% 안팎까지 높아졌다. 연간 지원 한도 역시 상향 조정되면서 제도의 안정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개편이 진행됐다.
아울러 신청 절차 간소화, 개별 심사 확대 등도 논의되기 시작하며, 초기 엄격한 요건 때문에 제도에서 배제되던 환자군에 대한 접근성 보완이 이뤄졌다.
본격적인 변화는 2023년 개편에서 나타났다. 이 시기부터 의료비 부담률과 재산 기준이 크게 완화돼 지원 문턱이 크게 낮아졌다. 소득 기준은 기준중위소득 100% 이하를 기본으로 유지하면서도, 연소득 대비 의료비 부담률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기준중위소득 200% 수준까지도 개별 심사로 지원이 가능하도록 범위를 확대했다.
재산 기준도 과세표준 7억원 이하로 완화됐고, 의료비 부담률 요건은 기존의 ‘연소득 대비 15% 초과’에서 ‘10% 초과’로 낮아졌다. 입원 진료는 기존과 마찬가지로 모든 질환에 대해 신청할 수 있었지만, 완화된 심사 기준이 적용되면서 실제 승인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외래 진료도 중증 중심 구조는 유지됐지만, 개별 심사 적용 폭이 넓어지면서 경증·만성질환이라도 의료비 부담이 커지면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재난적 의료비 신청은 제도 개선 이후 빠르게 증가했다. 2023년 재난적 의료비 신청 건수는 3만3585건이며, 지난해에는 전체 지원 건수가 5만735건 규모로 대폭 상승했다. 건당 평균 지원금도 상승했다. 2023년 평균 지원 금액은 약 301만원이었고, 2024년에는 약 312만원으로 소폭 증가했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 자료에 따르면, 연도별 지원액은 ▲2020년 340억원 ▲2021년 446억원 ▲2022년 601억원으로 완만한 증가를 보였지만, 2023년에는 1010억원으로 처음 1000억원대를 넘어섰다. 2024년에는 지원액이 1582억원으로 집계돼 불과 1년 만에 약 56% 증가했다.
사업 집행액 기준으로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예산 부족
지급 지연
2025년에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액이 2000억원대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있다. 실제로 지난 8월 말까지 집행된 금액만 이미 1368억원에 달해 역대 최대치 경신이 확실시 되고 있다.
신청자가 폭증하면서 예산이 조기 고갈돼 지난 10월에 일시적으로 지급이 중단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다. 일부에서는 “예산이 없어 지급 대기” 통보를 받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건보공단은 매년 하반기에 신청자가 늘어나는 추세를 예측한다. 이미 지난 7∼8월 보건복지부에 예산 부족 가능성을 알리고 추가 재원 확보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9월부터 추가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 재난적 의료비 지원액이 2023년과 2024년에 걸쳐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는 신청자가 많아졌다는 것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제도 기준 완화로 인해 신청 문턱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 지원액 폭증의 직접적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중증질환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재난적 의료비가, 최근에는 오히려 경증·만성질환 환자를 중심으로 급격히 확대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건보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 8월까지 재난적 의료비가 지원된 환자 중 중증이 아닌 질환자가 차지한 비중은 52.5%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중증질환 지원액(47.5%)을 이미 넘어섰다. 전체 지원 건수로 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17만6000여건의 지원 중 11만2000여건(63.6%)이 중증 이외 질환이었다.
재난적 의료비가 초기에는 암·희귀질환·심장질환 등 고액 중증환자를 중심으로 운영됐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경증 환자가 전체 지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특히 재난적 의료비가 실제로 지급된 상위 질환을 보면 척추병증, 추간판 장애, 무릎 관절증 등 근골격계 질환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지난해 지원액 기준 상위 10개 질환 중 6개가 척추·관절계 질환이었다.
추간판 장애만 65억원, 무릎 관절증은 64억원이 지급되는 등 중증질환보다 경증·만성질환이 더 많은 재정 지출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탈모, 성병 감염, 치아 임플란트 등 비교적 경미한 치료에도 재난적 의료비가 지급된 사례도 확인됐다. 제도 취지와는 달리 경증 환자 지원이 급격히 늘어난 셈이다.
올해 2000억원 돌파 전망
신청만 하면? 승인율 93%
경증 환자가 급격히 늘어난 가장 직접적 요인은 병원의 홍보다. 정형외과·신경외과·재활의학과 등 외래 중심 병·의원을 중심으로 ‘재난적 의료비 지원 안내’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실제로 한 병원은 홈페이지에 “재난적 의료비로 의료비 지원 가능”이라는 문구를 넣어 치료비 부담이 큰 환자에게 제도를 안내하고 있다.
그동안 재난적 의료비는 환자가 스스로 제도를 알고 신청해야 했지만, 최근에는 병원이 먼저 지원금 신청을 유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병원 입장에서는 정부 지원 안내가 환자 유입에 도움이 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난적 의료비를 신청한 의료기관에서는 전체 의료비 규모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 자료를 보면 재난적 의료비 신청 기관의 의료비는 비신청 기관 대비 평균 61% 더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경증 환자 증가의 또 다른 핵심 요인은 인구구조의 변화다. 고령층 비중이 확대되면서 재난적 의료비 부담률 기준을 충족하기 쉬운 구조가 만들어졌다. 은퇴 이후 소득이 크게 줄어드는 고령층은 동일한 의료비가 발생하더라도 소득 대비 의료비 비율이 빠르게 높아진다.
실제 중증 외 질환 지원액의 84.1%가 60세 이상에게 돌아갔다. 척추·관절·근골격계 질환은 고령층에서 발병률이 높고 비급여 항목 비중도 크기 때문에, 반복 치료와 검사만으로도 부담률 기준을 쉽게 넘게 되는 것이다. 고령층의 인구 비중이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지원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은 구조적으로 예정돼있었던 셈이다.
심사 기준도 문제로 지적됐다.
건보공단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재난적 의료비 신청 건수는 5만4734건으로, 이 가운데 5만735건이 승인돼 승인율이 92.7%에 달했다. “사실상 신청하면 거의 다 통과된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높다. 이는 신청자의 상당수가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심사 과정이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원액 폭증에는 의료비 자체의 상승도 영향을 미쳤다. 척추·관절 질환 중심의 비급여 진료비는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상승해 왔다. MRI·주사치료·도수치료 같은 비급여 항목의 단가가 높아지면서, 경증이라도 반복 치료가 쌓일 경우 본인부담 의료비가 빠르게 커진다.
이는 부담률 기준 충족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한번 지원되는 금액 자체도 자연스럽게 증가하게 만든다. 중증환자 중심이던 시기보다 경증·만성 환자가 대거 유입된 현재의 구조에서 비급여 상승은 재정 부담을 더욱 크게 만드는 요소다.
아무나
퍼주기
이 같은 흐름은 제도가 취지와는 다르게 운영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유발한다. 재난적 의료비는 도입 당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고액 치료비 때문에 경제적 위기에 놓인 중증환자를 보호하기 위한 보완 장치였다. 하지만 경증·만성질환 환자가 제도에 대거 유입되면서 고액 중증 중심으로 설계된 재정구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이 사실상 아무나 퍼주는 제도가 됐다”며 “현재 지원금 신청 폭증으로 지급이 지연되는 상황인데 나중에는 정작 필요한 사람이 받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질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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