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111년째 멈춘 행정지도, 이제 다시 그려야

2025.10.23 09:28:45 호수 0호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행정지도는 1914년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다. 조선의 13도를 통·폐합해 경상·전라·충청·강원·제주로 나누고, 시·군 지명을 일본식 행정체계에 맞춘 것이다.



그 후로 무려 111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의 지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산업 구조가 변했으며 인구가 대거 이동했고, 교통망도 확장됐는데, 지명과 행정구획은 일부 변경된 걸 제외하곤 여전히 일제강점기의 틀에 묶여 있다.

지명은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지역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비전을 만들어가는 나침반이다. 그런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명은 지역의 정체성과 비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전북의 중심은 전주에서 군산과 새만금 산업지대로 옮겼고, 경남의 경제 축은 진주가 아니라 창원·거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명은 그대로다. 지도 속 지명이 과거에 멈춰 있는 동안 현실은 엄청나게 많이 변했다. 그 결과 행정지도와 생활지도가 따로 돌아가는 기형적인 구조가 됐다.

지명을 바꿔야 하는 이유다.

도·광역시·특별시 그리고 시·군·구 지명을 그 지역의 특색에 맞게 바꿔야 한다. 그래야 지명에 걸맞는 지자체가 돼, 지명이 지자체의 브랜드가 될 수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름은 사회적 현실을 창조하는 언어’라고 했다. 지명을 바꾸는 일은 행정 절차가 아니라 국가의 상상력을 바꾸는 일이다.

지명 개편과 함께 행정구획 조정도 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행정구획은 수도권 집중, 지방소멸, 산업 편중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행정구획이 조정되면 행정 효율성 향상, 산업 경쟁력 강화, 균형 발전 촉진, 국민 정체성 회복 등을 기대할 수 있다.

충북·세종·충남의 행정 기능은 이미 하나의 중부권 메가시티로 통합돼있고, 경남·부산·울산은 물류와 산업망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돼있으며, 전북·광주는 호남 광역경제권으로 재편돼있다. 현재로서도 행정구획 조정은 자연스럽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중부권(현 충북·세종·충남)은 ‘충청혁신도’ 또는 ‘세종광역도’로 통합하고, 호남권(광주·전북·전남)은 ‘백제문화권도’ 또는 ‘호남광역도’로 통합하면 된다. 영남권(부산·울산·경남)의 경우 ‘남해산업도’로 재편하고, 대구·경북권은 ‘신라문화권도’로 통합하고, 강원도는 ‘동해생태도’로 명칭을 변경하고, 수도권은 경기남·북으로 나누는 대신 ‘한강권도’로 일원화하는 식이다.

이런 행정구획 조정은 단순히 지도에 선을 다시 긋는 것이 아니다. 산업, 교통, 환경, 문화, 인구의 흐름을 반영해 현실과 지도의 불일치를 바로잡는 것이다.

프랑스는 2016년 지방 행정개편에서 22개 지역을 13개로 통합했다. 알자스-로렌은 그랑에스트(Grand Est, 대동부)로, 보르도-리무쟁은 누벨아키텐(Nouvelle-Aquitaine, 새로운 아키텐)으로 재탄생했다. 지명과 구획이 동시에 바뀌면서 지역 정체성도 새롭게 형성됐다.

독일은 통일 이후 경제·문화권을 기준으로 5개 주를 신설하고, 기존 주의 경계를 다시 설정했다. 작센안할트, 브란덴부르크 같은 새 지명은 역사적 정체성과 산업 중심을 함께 담았다.

일본은 1991년부터 2005년까지 ‘헤이세이 대합병’을 통해 전국 시정촌 수를 절반으로 줄이면서, 지명을 산업과 문화에 어울리게 바꿨다. 예를 들어 다카야마시는 관광 브랜드를 살렸고, 기타큐슈시는 산업 도시 이미지를 통합시켰다.

이들 국가는 공통적으로 행정 효율, 산업 경쟁력, 지역 정체성을 지명과 행정구획에 함께 담았다.

이제 우리나라도 ‘행정지도 리디자인위원회(가칭)’를 구성해 전국 지명과 구획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해야 할 때가 됐다.


2026년 지방선거가 채 8개월밖에 남지 않았지만, 선거제도 개선 방안과 선거구 획정안을 논의할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도 아직까지도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

각 시도는 국회 선거구 획정안을 바탕으로 광역의원 정수와 선거구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 정개특위조차 가동되지 않았으니 올해도 각 시도 선거구획정위원회는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선거구 획정을 서두를 게 뻔하다.

특히 내년 지방선거 선거구 획정도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거대 양당 간 수싸움과 여기에 다양성 정치를 실현하려는 군소·진보 정당의 요구가 뒤엉켜 복잡한 양상을 띨 것은 자명하다.

필자는 ‘행정지도 리디자인위원회’ 기구가 만들어져 “선거 때마다 선거구 획정안을 논의하지 않아도 될 수준의 완벽한 행정구획 조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나눠진 지 600년, 일제감점기 때 지도가 유지된 지 111년이다. 이제 우리는 그 낡은 이름과 선을 지우고, 21세기 대한민국의 경제·문화·생태를 담을 수 있는 행정지도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행정지도를 다시 그려야 대한민국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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