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역사소설을 집필하는 필자 입장서 우리 역사를 살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등장한다.
조선조 반정으로 물러난 연산군과 광해군에 대해서다.
연산군은 조선조 제10대 임금으로 1494년부터 1506년까지 13년, 광해군은 1608년부터 1623년까지 무려 16년이란 기간 동안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두 사람이 비록 반정으로 물러났지만, 엄연히 조선의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왕이라 인정하면서도 묘호(廟號, 임금의 시호)는 왕이 아닌 왕자의 신분인 군으로 지칭하고 있으니 한편 살피면 커다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와는 반대의 사례를 들어보자. 먼저 고려시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경우다.
공양왕은 이성계에 의해 정략적으로 보위에 올랐으나 후일 조선이 건국되자 간성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으로 강등된다.
조선의 건국은 긍정적인 측면서 바라보면 새로운 국가의 성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정권 교체 측면서 살피면 이 역시 반정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공양군은 그 후 삼척으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사사되는데 역사는 그를 엄연히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조선조 6대 임금인 단종의 경우다.
단종 역시 반정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계유정난으로 인해 상왕으로 물러난다. 그 후 성삼문 등의 주도로 발생한 사육신 사건으로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귀양을 간다.
숙부인 금성대군은 유배지인 순흥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서인으로 전락하고 급기야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후일 숙종 시절 대군으로, 이어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한다.
상기의 사례를 살피면 연산군과 광해군의 경우 억울하기 짝이 없다.
이에 대해 그 두 사람이 재위 시 패륜, 즉 연산군은 두 숙의와 인수대비 등, 그리고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였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죽이려 한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사유 때문에 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다.
비교해 보면 태종 이방원, 그리고 수양대군 세조도 그들 못지않기 때문이다.
태종은 정몽주를 포함해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정도전, 남은 등을 위시해 이복동생들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후 원경왕후와의 불화가 빌미가 되어 네 명의 처남을, 또 단순히 경계 차원서 상왕으로 물러난 시점에도 자신의 사돈 심온(소헌왕후의 아버지) 등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세조 역시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운동 과정에서 태종 못지않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
김종서, 성삼문 등은 물론이고 아버지 세종의 부인(혜빈 양씨), 안평과 금성대군 등의 동생들, 그리고 단종까지.
이뿐만 아니다. 영조의 경우는 심지어 자신의 아들(사도세자)을 뒤주에 가두어 굶겨죽이기까지 했다.
각설하고, 최근 충북도가 청남대에 세워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 이유가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죄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란다.
충북도의 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필자의 입장서 살피면 참으로 아쉬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 역사를 미래에 대한 교훈으로 활용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덧붙여 시사주간지 <일요시사>가 창간 24주년을 맞이했다.
창간 이후 고집스러울 정도로 고수해온 ‘정론직필’의 정신으로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닌 미래를 설계하는 시금석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더불어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선도적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