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조선여인 사임당

2016.10.10 09:01:05 호수 0호

이수광 저 / 스타리치북스 / 1만5000원

북평 마을 천재 소녀 신인선, 조선 화류 여인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 행적이 남아 있지 않다. 사임당은 마흔여덟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녀는 평생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던 강릉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선영 두운리 자운산 기슭에 묻혔다. 훗날 율곡 이이는 어머니 무덤 아래 자운서월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사임당이 죽은 뒤 이이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가 되면서 그의 제자들이나 후인들이 이이를 떠받들기 위해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사임당을 숭배했다. 후대에 전하는 시 몇 편과 글씨 그리고 그림 몇 폭이 전부인데, 율곡 이이를 숭배하는 우암 송시열이 현모양처로 추앙하기 시작하면서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잘 키운 여자로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사임당은 현모양처라기보다 시인이며 화가인 예술가에 더 가깝다. 글씨나 그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사임당의 작품들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뒤흔들었다.
한 예로 영조 때의 문신 조구명은 사임당의 그림을 보고 하늘이 내린 천재라고 칭송했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집에 율곡 선생의 어머니가 그린 풀과 벌레의 그림 한 폭이 있었는데, 여름에 뜨락에서 햇볕을 쪼이다가 닭이 쪼는 바람에 종이가 마침내 뚫어졌다”라고 전하는 등 사임당의 예술가적인 면모를 칭송하였다. 더 나아가 사임당의 맑은 덕과 훌륭한 행실은 지금도 거론하는 자들이 규문의 최고 모범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사임당은 어떻게 천재 시인이자 화가가 되었을까?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어린 딸의 재주를 사랑하여 몽유도원도를 그린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인 안견의 그림을 구해 주어 공부하게 했다. 다정다감한 부모의 영향으로 사임당은 일찍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집안이 부유하여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여자가 시를 짓고 그림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사임당은 학문과 예술 활동이 제한되어 있던 시대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겨 더욱 빛이 났던 것이다.
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녀의 시를 읽고 그림을 보면서 그녀의 흔적을 찾아가다가 보면 조선의 아름다운 여인을 오롯이 만날 수 있다. 비록 50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오죽헌에는 그녀의 부드러운 웃음소리, 그녀의 치맛자락이 끌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임당의 4남3녀 중 이름을 남긴 사람으로는 율곡 이이, 금기서화에 뛰어나고 시인으로 명성이 높은 딸 매창, 그림으로 유명한 아들 우 등이 있다. 사임당의 흔적은 강릉 오죽헌, 파주 율곡리 등에 오롯이 남아 있다. 특히 오죽헌에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운 향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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