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고 안타까운 죽음과 치명적인 신체적 손상은 물론, 전 재산을 날린 사기 피해자들의 울부짖음이 보도되고 있다. 일부 피해자는 자신의 범죄 피해자화에 책임이라면 책임이고, 적어도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범죄 피해를 당한 그 시간과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고한 피해자가 된 이들의 억울한 울부짖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도 자신의 잘못이라고는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 그 사람과 한때나마 알고 지냈다는 이유 하나로 생명을 잃고 치명상을 당하고서도 오히려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자기 목소리를 낼 곳도, 기회도 없고 누구하나 들어주지도 않아 철저히 소외되고 침묵을 강요받는 것이 피해자들이 겪어야 하는 현실이다.
여기에 더해 형사사법제도의 절차와 과정에서의 2차 피해와 곱지 않은 사회적 시선이라는 이중적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면 과연 우리의 사법제도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며, 사법 정의는 실현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현실은 아마도 우리 사법제도와 절차의 한계와 그로 인한 피해자의 소외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큰 차이가 없는 공도의 문제로 형사사법 절차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사건임에도 자신이 당사자가 아닌 오직 ‘증인’의 지위에 그치고 검사가 당사자인 불공정한 경기장에서 불공정한 경기를 관람만 하는 꼴이다.
가해자인 피의자는 변호사까지 대동해 온갖 거짓과 선동과 변명을 주장할 수 있지만, 피해자를 대신한 검사가 과연 피해 당사자만큼 피해자의 고통을 법정에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형사사법은 그래서 피해자는 자신의 고통마저 법정에 전할 수 없는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되는 구조적 모순 그 자체인 것이다.
그나마 이런 불공정한 재판이라도 받아볼 수 있는 피해자는 ‘행운아’다. 절대 다수의 피해자는 재판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언론과 대중의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 오히려 불행은 함께 떼로 몰려온다고, 이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편견은 피해자를 두 번 죽인다.
바로 피해자다움의 강요다. 사회가 이미 정해놓은, 이미 정형화된 피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강요받는다. 이런 사회적 정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피해자화와 진술의 진정성을 통째로 의심하는 2차, 이중의 고통을 받는다.
형사사법은 그야말로 ‘범죄자 정의’를 추구한다. 이는 곧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법이라는 말로 맞는 말이다. 사법 절차는 검사와 피의자의 경기를 법관이 심판하는 것이다. 재판 어디에서나 ‘죄에 상응한 형벌’을 추구한다.
어디에도 피해자의 목소리와 이익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찰이 체포하고 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법원이 영장을 심사하는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도주와 증거인멸이 영장 심사의 금과옥조다. 이는 검찰과 법원의 행정 편의요, 피의자의 권리 보호에 지나지 않는다. 체포와 구속, 그리고 기소와 재판이라는 모든 사법 절차와 과정에서 심사와 판단, 심판의 1차적 기준은 가해자의 권리나 행정의 편의가 아니라 피해의 정도와 피해자의 목소리여야 한다.
형벌은 죄에 상응해야 한다는 비례의 원칙을 강조한다. 여기서 죄란 당연히 피해의 정도여야 하고, 이는 피해자만이 알 수 있음에도 아무도 묻지도 듣지도 않고 제3자들이 임의로 판단한다.
이들 제3자에게 있어서 죄는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등 자기 눈에 보이는 피해만 보지만, 피해자에게는 장래의 위협과 불안은 물론이고 이미 고통받고 있는 트라우마와 같은 심리적, 감정적 상처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가 있음에도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영장 심사나 양형에서 당연히 피해자의 고통이,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까지도 제대로 반영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모든 사법 절차와 과정에 들릴 수 있도록 피해자의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무고한 피해자에게 사법 정의란, 당연히 피해 이전의 상태로 완전하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형사사법이 아니라 피해자 사법이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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