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문화부 장관 중 ‘인기짱’ 누구?

2011.01.25 09:45:00 호수 0호

‘뭐니해도 머니가 최고’ 욕 많이 먹어도 ‘짱’



문화부 직원들이 선호한 ‘실세 소통령’ 박지원
국가대표 지성 이어령, 현장 중심 일개미 유인촌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정홍보처가 문화체육관광부로 통폐합됐다. 이는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 1월 문화공보부가 공보처(국정홍보처 전신)와 문화부로 나뉜 지 18년 만이다. 공보처의 첫 수장은 둘로 나뉘기 직전 문화공보부 장관을 역임한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였고, 실질적 초대 문화부 장관은 이어령 현 <중앙일보> 고문이었다. MB 정부 탄생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게 된 국정홍보처 마지막 수장은 2005년 3월부터 처장을 역임한 김창호 노무현재단 기획위원이다.



정부 홍보 업무와 문화 정책을 총괄하는 사령탑인 ‘문화공보부 장관’은 국민과 피부를 맞댈 기회가 많은 관계로 정부 직책의 요직 중 요직이다. 역대 장관을 살펴봐도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핵심 측근을 기용하는 경우가 잦았다. 노태우 정부 최병렬 장관과 김영삼 정부 주돈식 장관, 김대중 정부 박지원 장관이 대표적이다. 이명박 정부 유인촌 전 장관이나 신재민 전 장관 후보자도 이 대통령 핵심 측근 그룹에 속했다. 측근 그룹 외에는 주로 무게감 있는 정치인들이 가는 자리다. 김한길·남궁진·정동채 전 장관이 그랬다.

문화 예산 박지원 으뜸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내정자는 지난 1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국민의 정부 이후 업무성과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두 분을 꼽아달라”는 한나라당 진성호 의원의 질문에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를 꼽았다.

정 내정자는 “(지난 10여년의) 모든 문화부 장관은 제가 국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함께 했던 분들”이라며 “이 시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가장 인상 깊게 생각하는 분은 민주당 원내대표로 있는 박지원 전 장관”이라고 답했다. 그는 박 원내대표에 대해 “우리나라 문화 예산을 전체 예산의 1%대로 올려놓은 분”이라며 “당시 획기적인 변화를 이뤄 현재 우리나라 문화 예산이 전체의 1%를 상회하게 됐다”고 지명 이유를 밝혔다. 박 원내대표는 김대중 정부 시절 1년4개월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지난 18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그 답변(박지원)을 지켜본 적잖은 사람들은 씁쓸함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라고 밝혔다. 전 의원은 또 “정 후보자 발언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이 청문회 전략이나 가랑비 전략으로 흠집내려는 야당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성 발언이라고 표현했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한편 ‘대한민국 대표 지성’이라 불리는 이어령 전 장관은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 전 장관은 유인촌 전 장관이 ‘최장수 문화부 장관’ 신기록을 수립하기 전까지 ‘716일’로 역대 최장수 문화부 장관에 이름을 올렸다. 이 전 장관은 여든에 가까운 나이(1934년생)에도 여전히 자기 분야에서 ‘팔팔한’ 호흡을 하며 첨단 기기 및 고대문화와 관련된 ‘통섭’ 강의를 펼치고 있다. 이 전 장관은 이제껏 남보다 한발 앞서 한국 사회 변화를 예고하는 등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왔다. 그는 나이와 세대를 넘나드는 ‘두터운’ 열성 지지층이 형성됐을 정도로 저술 및 창작 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2002년 대선 당시 ‘월드컵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소위 말하는 ‘월드컵 세대’들의 발걸음이 투표장으로 이어져 2030세대 투표율이 높아졌다. 이는 당시 노무현 후보가 ‘당선’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남궁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재임 기간인 2001년 9월부터 2002년 7월까지 ‘2002 한·일 월드컵’의 한 복판에 있었다. ‘2002 월드컵’은 2002년 5월31일부터 6월30일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된 월드컵 축구대회다. 남궁 전 장관은 ‘2002 월드컵’ 성공 개최를 통해 본인은 물론 정권의 지지율 유지에 큰 몫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퇴임 후 ‘바다이야기’ 파문과 연루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현장 예술인 출신도 눈에 띈다. 이창동·김명곤·유인촌 전 장관이 그들이다. 노무현 정권 초대 장관을 지낸 이창동 전 장관은 취임부터 ‘영화감독 출신’이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전 장관은 심지어 수행 비서로 남성을 지명하는 것과 달리 문화부 발령 1년이 채 안된 27세의 여성을 수행비서로 지명하는 ‘파격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밤늦게까지 장관의 집까지 수행하는 등 기존의 불합리한 관행을 타파하기 위함’이었다고 지명의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현장 예술인 출신도 다수

노무현 정권 당시 한 인사에 따르면 김명곤 전 장관의 발탁 이유는 민간인 출신 첫 국립극장장으로 국립극장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크린쿼터’와 관련된 말 바꾸기로 장관 자리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기도 했다. 김 전 장관은 취임식 자리에서 문화부 직원들에게 자신의 뜻대로 자유롭게 창조하는 ‘광대 정신’과 현장중심 업무를 강조했다. 문화부에 정통한 소식통은 “김 전 장관은 부처 직원들과도 스스럼없는 관계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고 전했다.

최근까지 직무를 수행한 유인촌 전 장관은 2년 11개월 여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며 현 정부 장관에서뿐 아니라 역대 문화부 장관 중에서도 ‘최장수 장관’ 기록을 세우게 됐다. 유 전 장관은 2008년 2월 탤런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문화부 장관 직에 올라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유 전 장관은 재직 당시 서울과 지방을 넘나들며 무명 예술인과 재래 시장까지 찾아다닐 정도로 현장을 많이 챙겨 부지런한 ‘일개미’ 장관이라는 평을 직원들로부터 듣기도 했다. 문화부의 한 관계자는 “정말 강철체력이다. 함께 다닌 우리가 더 빨리 지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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