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미집행 20년> 사형수의 삶과 죽음 ‘풀스토리’

마지막 사형수를 아십니까?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사형제를 둘러싼 논쟁은 ‘해묵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됐다. 우리나라는 20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지만 법률상으론 여전히 사형제 존치 국가다. 이 때문에 사형 집행과 폐지를 두고 ‘끝나지 않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일 제15회 ‘세계 사형 폐지의 날’ 행사가 있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15개 단체로 구성된 ‘사형제 폐지 종교·인권·시민단체 연석회의’는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서 사형 폐지의 날 기념식을 열었다. 이들은 “사형집행 중단 20년을 앞둔 현재 우리나라가 실질적 사형 폐지국을 넘어 완전한 사형 폐지국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형 폐지의 날
특별법 나오나

연석회의는 성명을 통해 “제15대 국회를 시작으로 매 국회에 사형제도 폐지 특별법이 발의됐으나 단 한 차례도 법제사법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사실은 매우 안타깝다”며 “이번 20대 국회서 많은 의원들이 특별법 공동발의에 동참해줄 것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유흑식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은 인사말서 “오늘 기념식은 우리나라가 사실상 사형 폐지국서 법률상 사형 폐지국으로 가는 자리로 생명의 가치가 존중될 때 인간의 잔인함도 치유된다”고 말했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이날 축사에서 “일각에선 흉포해지는 범죄에 대응해 사형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하지만 국제적으로는 범죄 종류를 떠나 한 사람의 생명을 국가가 앗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우세하다”며 “국회는 헌법 개정과 법안 심의 과정서 사형제도 폐지에 힘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했다.


실질적 폐지국이지만 법률상 존치
김대중정부 이후 사형 집행 수 ‘0’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30일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올해 12월30일이면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지 꼭 20년이 된다. 일본이 2012년 아베 신조 2차 내각 출범 이후 19명의 사형을 집행한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일본은 지난 7월에도 사형수 2명에 대한 형을 집행했다.

국제사회에선 우리나라를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하지만 강력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형제 존치에 대한 여론은 치솟았다. 

2004년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이나 2010년 여중생을 납치·살인한 김길태 사건 이후 진행한 조사에서 사형제 유지 응답은 평소에 비해 높았다. 실제 여론은 사형제 폐지보다 존치 쪽으로 좀 더 기울어져 있다.

한국법제연구원이 발표한 2015년 국민 법의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5%는 사형제 폐지에 반대했다. 최근에도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된 사형제 관련 여론조사를 보면 대중의 사형제 폐지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정적인 걸 알 수 있다.
 

<중앙일보>가 지난달 17∼18일 양일간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서 ‘사형제 폐지에 반대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66.1%에 달했다. 지난 9일 <세계일보>의 여론조사에서도 ‘사형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79.4%로, 80%에 육박했다.

헌법재판소는 사형제 위헌 여부 심판서 두 차례에 걸쳐 합헌 결정을 내렸다. 1996년 사형을 최고형으로 규정한 형법에 대한 위헌 소원 심판서 7(합헌)대 2(위헌)로 합헌 판결이 나왔다. 


당시 김용준 헌재 소장 등 7명의 재판관은 “인간의 생명을 부정하는 범죄행위 등 지극히 한정적 경우에만 부과되는 사형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공포와 범죄에 대한 응보욕구가 서로 맞물려 고안된 필요악”이라고 다수 의견을 냈다.

그로부터 14년 후인 2010년 헌재는 또 다시 사형제에 대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내용면에서 1996년과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먼저 7명이었던 다수 의견이 5명으로 줄었고 위헌 의견이 4명으로 늘었다. 또 일부 재판관들은 사형제 오·남용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혀 논란의 불씨를 살려뒀다.

당시 헌재는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도 없는 권리”라며 “비상계엄에 대한 재판에선 그렇지 않지만 우리 형법은 적어도 아직 간접적으로나마 사형제를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사형제는 생명권 제한에 있어 형법 제37조에 의한 한계를 일탈했다고 할 수 없으며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규정한 헌법 10조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96년과 2010년 헌재가 합헌 결정을 내릴 당시 소수 의견을 냈던 재판관들은 인권의 토대인 생명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할 수 없다는 헌법 정신을 강조했다. 또 형벌로서 사형제가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대선 후보 시절부터 사형제 폐지에 대한 소신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대선후보 TV토론회서 “사형이 흉악범죄 억제효과가 없다는 데 전 세계가 공감하기 때문에 160여 국가가 사형제를 폐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생존 사형수 65명
70대부터 20대까지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 세계 198개국 중 104개국이 법률상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다. 우리나라처럼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는 37개국이다. 전 세계 국가 중 141개국(71%)이 법률상 또는 사실상 사형을 폐지한 셈이다.

사형 미집행 기간이 20년에 이르러 사형제 존폐 논란이 또 다시 불거지자 자연스럽게 사형수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현재 생존해 있는 사형수는 65명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인이 61명, 군인이 4명이다. 
 

20년간 사형 집행이 이뤄지지 않다보니 사형수들의 고령화가 뚜렷해지는 추세다.

최고령 사형수는 2007년 8월 전남 보성군으로 여행 온 대학생들을 바다에 빠뜨려 살해한 오모씨로 추정된다. 이른바 ‘보성 어부 살인사건’이다. 그는 여행 온 남녀 두 사람을 자신의 배에 태운 뒤, 여성을 성추행하기 위해 남자를 먼저 바다로 밀어 살해하고 저항하는 여성까지 물에 빠뜨려 죽였다.

유영철·강호순
10명 이상 죽여


최연소 사형수는 2014년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임모(25) 병장으로 알려졌다. 범행 당시에는 21세의 어린 나이였다. 그는 동료병사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해 5명을 살해하고 7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범행 직후 무장한 채 탈영해 자살을 기도했으나 결국 체포됐다.

임 병장은 “부대 안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진술했지만 재판부는 1심과 2심서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2016년 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9대 4로 사형 확정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학창시절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고 인격 장애 증상이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부대 내 조직적 따돌림이나 폭행, 가혹행위 등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움을 겪었다고 볼만한 사정은 찾아볼 수 없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최장기 사형수는 원모씨로 올해로 25년째 복역 중이다. 원씨는 지난 1992년 10월 강원 원주에 위치한 여호와의 증인 왕국회관에 불을 질러 15명을 사망케 했다. 중화상을 입은 사람도 36명에 달했다. 사망자 중에는 10세 이하(2명), 10대(4명) 등 어린아이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93년 대법원서 사형이 확정됐다.

원씨처럼 10명 이상을 살해한 사형수는 희대의 연쇄살인범인 유영철과 강호순 등 두 명이다.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노인과 부녀자 등 21명을 살해했다. 유영철의 검거 이후 국내서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 장애)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강호순은 2004년부터 5년여에 걸쳐 10명의 부녀자를 납치해 성폭행·살해한 혐의로 2009년 사형이 확정됐다. 강호순이 살해한 사람 중에는 그의 아내와 장모도 있었다. ‘제2의 유영철’로 불렸던 정남규도 부녀자 13명을 연쇄 살인하는 등 10명 이상을 죽이고 사형이 확정됐지만 2009년 자살로 목숨을 끊었다.


사형제 폐지 반대여론 여전히 높아
강력범죄 발생할 때마다 급격히↑

현재 복역 중인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은 기약이 없다. 마지막 사형 집행은 1997년 김영삼정부시절이다. 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30일, 20여명의 사형수가 한꺼번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형이 집행된 사형수는 살인 15명, 강도·살인 4명, 상습 강도·강간 2명 등 23명이다.

이중에는 법정에 증인으로 섰던 사람을 살해한 변모씨, 여의도 광장서 ‘묻지마 질주’를 벌여 20여명을 죽거나 다치게 한 김용제, 고소 취하를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권총을 난사해 4명을 살해한 경찰관 김모씨 등이 포함됐다.
 

1997년 사형 집행은 김영삼정부 출범 이후에만 1994년 15명, 1995년 19명 이후 세 번째였다. 또 긴급조치 시대인 1976년 27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이후 최대 규모였다. 23명 가운데 4명은 사형 집행 이후 안구와 사체를 기증했다.

1997년 형이 집행된 이들 가운데 ‘마지막 사형수’로 알려진 인물은 시각장애인 김용제다. 그는 1991년 차를 몰고 여의도광장을 마구잡이로 질주했다. 이 과정서 초등학교 5학년 아이와 여섯 살 난 유치원생이 차에 치었고 그 둘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럼에도 차를 멈추지 않은 김용제는 질주를 거듭,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 2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그의 삶은 불행했다. 어머니는 김용제가 초등학교 때 가난을 견디지 못해 가출한 뒤 소식이 끊겼고 몇 년 후에는 아버지가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시각 장애를 앓아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체구도 작았던 그는 친구들로부터 잦은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눈 때문에 책이나 칠판을 잘 볼 수 없어 성적도 좋지 않았다.

일자리를 구했지만 시력이 나쁜 탓에 실수가 잦았다. 실수로 인한 손실이 커지자 회사는 그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일자리를 찾아도 얼마 안 돼 해고 당하는 일이 반복되자 김용제는 체념했다. 

식당 일이나 막노동 자리에 기웃거렸지만 눈이 잘 안 보이는 그에겐 모두가 높은 벽이었다.

경제적·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린 그는 다니던 양말 공장 사장의 자동차 키를 훔쳤다. 김용제는 훔친 차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 찬 그는 1991년 10월19일 KBS 앞으로 차를 몰았고 광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돌진했다. 여의도 광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그는 차가 멈추자 한 여중생을 잡아 인질극을 벌였다. 김용제는 몰려든 시민들과 여중생을 두고 대치했지만 금세 제압당했다.

‘사형수들의 대모’로 불리는 조성애 수녀는 그의 일기를 엮어 <마지막 사형수>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김용제는 사형 선고를 받은 날부터 일기를 썼다. 책은 그의 일기와 조성애 수녀의 편지로 완성됐다. 
 

<마지막 사형수>는 사형수가 남긴 최초의 기록 모음을 출간했다는 점에서 높은 관심을 받았다.

조성애 수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사형이란 가해자에겐 참회의 기회를, 피해자에겐 용서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며 “용서를 못 한 피해자들은 사형 집행 이후에도 행복하지 않더군요. 용서란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아름다운 사랑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용제의 범행으로 손자를 잃은 서모 할머니는 그의 성장 배경을 알고 선처를 탄원하는 등 용서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불우한 성장배경
책으로 나오기도

앞서 1995년 11월에는 전국을 경악에 빠뜨렸던 지존파 6명을 비롯, 19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지존파는 두목 김기환을 중심으로 20대 청년과 10대 가출소년이 모여 만든 범죄 단체다. 

대부분 불우한 가정환경서 자란 이들은 부유층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갖고 범행을 저질렀다. 지존파는 1993년 7월 20대 여성을 성폭행한 후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1994년 9월까지 4차례에 걸쳐 사람을 납치, 토막 살해하는 엽기적인 범행으로 대중을 공포에 떨게 했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정세균 “사형제 폐지는 이성적 판단해야”

정세균 국회의장은 ‘세계 사형 폐지의 날’ 축사에서 “사형제도 폐지 여부는 감성적 판단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에 근거해야 한다”며 “사형제도는 반정부 인사에 대한 탄압 수단으로 악용되거나 오판의 위험도 있다”고 말했다.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1975년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사례로 든다. 인혁당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1964년과 1975년 두 차례였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은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하면서 드러났다.

그로부터 10년 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 발생했다. 중앙정보부가 1974년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배후·조종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 이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는 남한 내 지하조직이라고 규정한 사건이다.

주범으로 지목된 8명은 1975년 4월8일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확정 판결 후 불과 18시간 만인 4월9일 기습적으로 형이 집행됐다. 국제법학자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꼽기도 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9월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고문 등을 통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이후 법원은 2005년 재심을 수용, 2007년 1월 사형 당한 8명의 전원 무죄가 확정됐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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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