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회고록 사태> 반기문 ‘북미 라인’ 대해부

반기문 사단 5인이 움직인다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장관의 ‘회고록 사태’가 정치권을 집어삼켰다. 회고록에는 지난 2007년 참여정부가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기권 여부를 북한에 물어보고 결정했다는 식의 내용이 담겨있어 파장을 낳았다.

‘국기문란’이라는 여당의 주장에 야당은 ‘색깔론’이라 응수하며 치열한 정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야당에선 집필자인 송 전 장관이 반기문 사단 중 핵심인 ‘북미국 라인’이라는 점을 들어 다른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의도적인 ‘반기문 띄우기’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송민순 회고록 사태서 핵심은 과연 참여정부가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이하 결의안) 표결 기권을 결정하기 전, 북한 측에 찬반 의사를 물어봤는지 여부다. 만약 북한과 협의 후 기권 결정을 내렸다면 여당의 주장대로 사전 문의가 되는 것이지만, 참여정부 수뇌부에서 기권을 결정한 다음 북한에 이를 알렸다면 사후 통보가 되기 때문.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쓴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비핵화와 통일외교의 현장>에는 북한의 의사를 물어본 뒤 기권을 결정했다고 쓰여 있다.

회고록 사태
반 측근 기획?

회고록에 나온 결의안 기권 과정은 다음과 같다.


2007년 11월15일 송민순 장관 결의안 채택 주장 → 이재정 통일부장관, 김만복 국정원장, 백종천 안보실장 기권 주장 → 문재인 비서실장 기권으로 합의해 노무현 대통령께 건의 제안 → 송 장관 거부 → 16일 노 대통령 주재 하에 5인 토론 → 18일 재차 토론했으나 합의 실패 → 김 원장 북한 측 의견 확인 제안 → 송 장관 제외 나머지 토론자 찬성 → 문 실장 북한 의견 확인하는 것으로 결정 → 20일 결의안 반대한다는 북한 입장 회신 → 노 대통령 결의안 기권 결정.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연설기획비서관과 공보담당비서관을 역임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 김경수 의원이 지난 16일 회고록 내용을 반박했다. 그는 “(결의안에 대해) 기권을 먼저 결정하고 이 사항을 남북정상회담 직후 남북 간 다양한 대화가 이뤄지는 시점에 북에 전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결의안 채택 찬반 토론을 벌인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2007년 10월2∼4일, 노무현-김정일)이 열린 지 40여일이 지난 11월 중순부터 유엔 결의안 표결이 있은 11월20일 사이다.

만약 회고록 내용대로 북한의 입장을 전달 받은 후 11월20일에 참여정부가 기권을 결정했다면 우리 외교사에 흠집이 남는 사건이지만, 김 의원의 말대로 기권을 결정한 후 북한 측에 사후 통보했다면 외교관계상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국기 문란’이라며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 공세에 나선 상태다. 정진석 원내대표를 포함한 새누리당 지도부는 “회고록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는 문 전 대표가 대한민국 주권을 포기한 국기 문란 행위”라며 몰아세우고 있다. 새누리당 측은 문 전 대표의 해명과 함께 국정조사, 국회청문회, 특검, 검찰수사 등을 거론하며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중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회고록 내용의 진위 여부뿐만 아니라 집필에 숨겨진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외교가 속설로 본다면 송 전 장관이 논란이 될 지 모르고 회고록을 썼을 리 없다는 것이다. 앞서 송 전 장관은 “정치적인 의도로 (회고록을) 쓴 것이 아니다”라며 “책 전체 흐름을 봐야지 일부만 보면 안 된다”고 기자들 앞에서 해명했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더민주 측은 회고록에 문 전 대표에 대한 부분은 유독 의혹을 살 만한 내용이 많은 반면 반 총장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내용이 다수 실려 있다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회고록서 문 전 대표는 크게 3가지 사건에서 부정적으로 기재돼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지난 2007년 결의안 기권 결정 과정과 함께 ▲샘물교회 교인 탈레반 인질 사건 ▲10·4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안 조정 등이 그것이다.

집필자인 송 전 장관은 샘물교회 교인 탈레반 인질 사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8월 초 탈레반 조직은 인질 석방 협상을 하려면 한국 정부의 신임장을 휴대한 대표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중략) 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김만복 국정원장과 이재정 통일부장관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신임장이라도 써 보내자고 주장했다. 문재인 비서실장과 백종천 안보실장도 찬성했다. 김장수 국방장관은 중립이었다. 며칠 후 알게 되었지만, 이때는 남북 정상회담 일자를 비밀리에 막바지 조정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을 수도 있었다.’

도마 오른
기권 시점

10·4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안 조정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직통전화로 평양 현지팀과의 교신을 관리하고 있던 문재인 비서실장에게 두 가지를 반영할 것을 요청했다. 하나는 ‘종전선언’ 앞에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의 진전’을 강조하는 표현을 먼저 넣고 또 ‘3자 또는 4자’를 ‘직접 관련 당사자’로 (문구를) 바꾸자고 했다. (중략)

그런데 결과는 종전선언 문장 다음에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의 성실한 이행을 위해 공동 노력한다’는 조항만 넣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3자 또는 4자’는 그대로 남았다.’

반면 반 총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우호적이다. 반 총장은 해당 회고록서 14개 일화에 걸쳐 그 이름만 총 35차례 등장하는데, 주로 6자 회담, 9·19 남북공동성명 협의 과정 등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강조하는 부분에 등장한다.
 

특히 반 총장이 외교부장관으로 있던 2005년 9·19 남북공동성명 협의 과정에 대한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 작업(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북·미·중·일 외교당국과의 중재)을 하면서 분단관리와 통일외교에 대해 내 나름의 의식을 갖게 해주고, 또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여러 선배들이 떠올랐다. 어떤 난관도 깊은 물처럼 헤쳐 나가는 지혜를 보여준 반기문 외교부장관 같은 분들.’

여야 진실공방 국기문란 VS 색깔론
집필 의도는 과연…결국 반 띄우기?


지난 2006년 한미정상회담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반 장관을 만난 일화에서도 우호적인 내용이 두드러진다.

‘부시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반 장관이 괜찮은 사람입니까?”라면서 농담을 던진 후에 반 장관을 보고는 “왜 그 자리(유엔사무총장)를 원합니까”라고 마치 면접을 보듯이 물었다.

반 장관은 (부시 대통령의 질문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한국이 민주주의와 인권, 시장경제의 성공 사례로 성장했는데, 이제 한국도 유엔을 통해 국제사회에 공헌하고 특히 유엔의 개혁에 공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부시가 듣고 싶은 핵심을 짚었다.’

때문에 일각에선 회고록이 나온 시점을 주목하고 있다. 최근 국제 언론은 반 총장에 대한 혹평을 내놓은 바 있다.

보도된 내용을 보면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역대 최악의 사무총장’, 가디언지는 ‘유엔을 심각하게 약화시킨 사무총장’, 미국 뉴욕타임즈는 ‘힘 없는 관측자’, 월스트리트저널은 ‘유엔의 투명인간’, 포린폴리시는 ‘가장 위험한 한국인’, 워싱턴포스트는 ‘반 총장이 이끄는 유엔은 무능해지고 있다’고 평했다.

해당 소식은 지난 5월부터 6월 사이 집중적으로 국내에 전해졌다. 이후 복수의 대선주자 선호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반 총장의 지표에 유의미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권을 중심으로 ‘반기문 대망론’은 허상이라는 반응이 퍼졌다. 야권의 한 의원실 관계자는 “외국서 반 총장이 무능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며 “미국의 한 상원(의원)조차 반 총장을 그렇게 평가했다. 특히 북핵 문제에 있어서는 성과가 없다는 평가가 많다”고 전했다.

결과적으로 회고록은 국내외서 일고 있는 ‘반기문 무능론’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북핵 문제에 많은 부분을 할애, 반 총장이 과거 외교부장관으로 있을 때의 성과를 부각시켰다. 일각에서 의도된 ‘반기문 띄우기’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외교적 성과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회고록이 때마침 등장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공격
반기문 칭송

더민주 문용식 전 디지털소통위원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송 전 장관이 회고록을 정식 출간하기 전 문제가 되는 부분을 사전에 몇몇 기자들에게 보여줬다는 얘기가 있다“며 “자신의 발언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외교관 직업의 특성인데, 외교관 생활을 30년 넘게 하고 장관까지 한 자가 회고록에서 ‘북한과 사전 협의’라고 표현한 부분이 논란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전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어 “송 전 장관은 반 총장의 핵심 참모그룹이라는 언론 보도가 있다. 반 총장이 사실상 대선 출마를 선언한 바로 다음날 점심을 함께 먹은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정치권에선 이번 회고록 사태 후 반 총장의 ‘북미국 라인’을 주목하고 있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반 총장의 인맥은 외교관 출신들로 채워져 있다. 그 중 북미국 출신들이 핵심이라고 봐야 한다”며 “반 총장이 대선에 출마한다면 그들이 캠프를 이끌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외교부 1차관 산하에는 ‘지역국’이라는 양자외교 담당·지원 부서가 있다. 지역국은 주재국 대사관 등을 통해 각국과 외교 관계를 다지며 여러 협력사업을 꾸려 나간다. 또한 관할 지역에 관한 외교정책을 수립하는가 하면 대사관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우리 외교의 ‘컨트롤타워’인 셈이다.

그 중 북미국은 외교부 내 최고 핵심 부서로 뽑힌다. 외교관 고위직으로 성장하려면 미국을 담당하는 북미국과 주미대사관을 거쳐야 하는 불문율이 있을 정도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북미국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북미국이 요직이니 외교관들이 그쪽으로 많이 가려고 한다. 우리가 외교적으로 가장 많이 의지하는 곳이 미국이지 않나. 미국 쪽 라인이 있어야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 있다. 외교부 내 최고 실세라 봐도 무방하다. 청와대 인사들 중에도 북미국 출신이 많다. 외교관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이다. 북미국이 미국의 정보를 꽉 잡고 있으니 당연한 말이다.”

측근들 언제 어떻게 뭉칠까
싱크탱크 결성 초미의 관심

대표적으로 반 총장이 북미국 출신이다. 그는 주미국 대사관 참사관 겸 총영사를 지낸 뒤, 외무부 미주국장(외교부 북미국의 전신, 1996년 북미국으로 명칭 개편)을 지냈다. 이후 외교통상부 차관을 거쳐 참여정부 7대 외교부장관에 임명됐다. 회고록을 쓴 송 전 장관은 외무부 북미과장, 미주국 북미심사관, 북미국장 등을 두루 역임한 뒤 반 총장 후임으로 참여정부 8대 외교부장관이 됐다.

‘반기문의 남자’라고도 불리는 윤여철 청와대 의전비서관 또한 북미국 출신이다. 북미국 서기관이던 지난 2001년, 뉴욕 유엔본부에 파견돼 당시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을 맡았던 반 총장을 보좌했다. 지난 2006년 반 총장이 유엔사무총장에 선출된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8년여 동안 반 총장의 일정을 관리하는 등 동고동락했다.

윤 비서관은 반 총장의 가족과도 막역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0월 외교부로 복귀했으며 지난 2월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임명됐다. 상당히 드문 사례로 일각에선 이를 통해 박 대통령과 반 총장 사이에 ‘인적 핫라인’이 개통됐다고 해석했다.

반 총장의 ‘오른팔’로 통하는 김숙 전 유엔대표부 대사도 대표적인 북미국 출신 인사다. 외무고시 12회를 나온 김 전 대사는 외교부 북미국장, 국정원 1차장, 주유엔 대표부 대사로 부임하는 등 반 총장과 지근거리서 일했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대한민국대사관 대사 또한 주요 북미국 인사로 꼽힌다. 주미국대한민국대사관 참사관, 외교통상부 장관보좌관을 거쳐 지난 2003년 외교통상부 북미국장을 지냈다. 그는 지난 2003년 10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외교 각서 초안을 미국 측에 보내 논란이 된 바 있다. 이는 외교부가 청와대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제외하고 미국과 합을 맞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지난 2014년까지 외교부 북미1과장을 맡았던 장욱진 유엔사무총장 보좌관은 반 총장의 최측근으로 물리적 거리로는 반 총장과 가장 가까운 인사다. 장 보좌관은 북미1과장을 역임하던 중 휴직하고 유엔으로 넘어갔다. 지난 2000년 반 총장이 외교통상부 차관일 때 그를 수행했으며 지난 2004년 반 총장이 장관에 취임한 뒤에는 비서관으로 일했다.

“반기문 캠프
이끌 사람들”

정치권에선 반 총장이 대선 출마를 위해 곧 싱크탱크를 출범할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다. 때문에 소위 ‘반기문 사단’이라 불리는 이들 5인방이 싱크탱크서 뭉칠지도 정치권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일각에선 후배 외교관들을 중심으로 ‘반기문 재단’ 설립을 추진 중이라는 구체적인 정황까지 나오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반기문의 ‘유엔 라인’
대권 불씨 피울까?

북미국 출신 이외에도 반 총장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좌한 유엔 인사들이 주목받고 있다. 이상화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 북핵외교기획단 단장은 유엔사무총장 비서실에서 7년 넘게 근무하며 반 총장을 보좌했다. 그는 당시 근무하면서 겪었던 일을 <유엔본부 38층-유엔과 반기문 리더십>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어냈다.

김원수 유엔 사무차장은 외무고시 12회로 김숙 전 유엔대표부 대사와 함께 기수 핵심 인사로 꼽힌다. 주유엔대표부 참사관을 지냈으며 지난 2006년 반 총장이 유엔사무총장에 출마했을 때 특별대사를 맡아 선거운동을 총괄한 바 있다. 당시 당선을 도운 다른 외교관들은 외교부로 복귀한 반면, 김 차장은 외교부를 퇴직, 유엔으로 옮겨 비서실 차장, 특별보좌관 겸 개혁담당 사무 차장보 등을 맡아 활약했다.

가까이서 보좌한 인사들 주목
주재 한국대표부 대사 출신들

오준 유엔 주재 한국대표부 대사 또한 반 총장의 핵심 측근 인사로 전해진다. 그는 한국시간으로 지난 4일 뉴욕 유엔 한국대표부에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국정감사에 참석, 야당 의원들이 반 총장의 대선 출마가 1946년 유엔총회 결의에 위반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자 “모든 유엔총회 결의는 권고적 성격의 결의”라며 “결의에 ‘퇴임 직후’라는 표현이 있는데 해석의 여지가 있다. 유엔사무총장을 지내고도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고 대선에 출마한 사람도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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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