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별기획> 일제강점기 4인의 지주일기 최초 공개

“상투 잘리는 순간 하늘이 무너졌다”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일제 말기에 들어 식민지 조선의 주민들은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으로 전시체제하의 고통스러운 삶을 강요받았다. 조선인으로선 처음 겪는 전시체제하의 일상생활은 끊임없는 동원과 수탈로 인해 의식부터 식생활에 이르기까지 통제받았다.

특히 조선은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라는 역할이 주어져 타 식민지보다 더 깊숙하게 전쟁체제에 편입됐다. 이는 각종 공출, 징용, 징병, 부역, 헌금 등 제도로 정착돼 조선사회의 뿌리인 촌락과 농민의 일상까지 질적으로 변화시켰다. 당시 사회는 90% 이상의 인구가 농촌에 거주했고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서민들 역사 복원 
창씨개명과 정치동원

그간의 일제강점기 연구는 식민당국자가 발행한 자료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식민 통치자의 시선으로 구성된 연구가 주를 이뤘으나 최근 <일기로 구성한 일제말 전시체제하의 일상>(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이라는 연구논문이 나와 일제강점기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아래로부터의 역사 구성’을 시도했다. 특히 1930∼40년대에 전쟁 수행을 위해 수립한 지배체제는 해방 이후에도 연속성을 띠고 오랫동안 운영된 점, 현재에도 남북한 모두 그러한 구습과 제도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논문에 등장하는 일기는 모두 4편으로, 일기의 저자 중 3명은 보수적 유생이자 중소지주이고, 나머지 1명은 식민지기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문학적 감성을 가진 폐병을 앓는 신식 지식인이다.

정강일기(1938∼1948)의 주인공 김주현은 경제력과 구학력을 갖춘 유지다. 치재일기(1911∼1962)의 주인공 김인수(1892∼1962)는 평생 동안 전통 의복을 고수하며 양복을 비롯한 모든 서양문물을 거절했다.


8·15 이후에도 직접 짚신을 삼아 신었으며, 손자가 학교에서 상투가 잘려왔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심정을 밝혔다. 김인수는 1925년 세상을 한탄하고 충북 중원군 동량면 하곡의 개천산으로 들어가 28년간 두문불출했다.

관란재일기(1912∼1947)의 저자 정관해(1873∼1949)는 보수적 유생이었지만 용인지역이 세상의 변화와 소식을 빠르게 수용하는 곳이어서 세상의 변화에 민감했다.

추탄일기(1936∼1942)를 쓴 박정락(1914∼1943)은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과 야학활동을 하다가 1932년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될 때 외곽조직인 Y그룹 활동과 관련해서 함께 체포됐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독서와 글쓰기 등으로 소일하면서 지역 유지로 활동하다가 1943년 30세 때 지병인 폐병으로 사망했다.

이들의 일기를 통해 식민지기 농촌의 인력동원(징용, 부역, 징병)과 물자동원(강제저축, 공출, 헌금), 창씨개명 등의 양태를 엿볼 수 있다.

정강일기의 1941년 11월 기사에 의하면 “집집마다 가는 모래 1석, 물 1동이를 문 옆에 비치하고 일본 국기를 게양하라 했다. 물어보니 경방대 방공연습이라 한다. 방공이란 것은 외국 비행기가 내공하여 폭격하는 것을 방어하는 것이니, 과연 내공한다면 어찌 그것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민심을 소동케 하는 것일 뿐이다”라며 염려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방공(비행기 폭탄) 훈련을 확대하면서 방공업무가 농촌 주민의 일상 속에 연래행사로 강요됐음을 드러내고 있다. 시골 유생에게 이것은 생경한 행정 간섭이었다. 현재에도 실시되는 방공훈련이 태평양전쟁 이후부터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집회와 시국동원에 대해선 치재일기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각종 시국좌담회, 중일전쟁 승전축하회, 싱가포르 함락 축하회, 한구 함락 축하회, 군인출정 환송식 등의 시국집회와 가마니짜기 장려회, 양잠강습회, 식량좌담회 등의 생산 관련 모임이 나타난다.


보수적 유생 3명·신식지식인 1명 기록서
일제 수탈에 찌든 모습 생생하게 나타나

일기의 주인공은 전쟁 초기엔 시국집회에는 물론이고 유림간담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면장이 불참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한 뒤부터는 시선을 의식해서 참석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치재일기는 창씨개명에 대해 주인공 김인수가 최대한 버티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인수는 “소위 창씨라 하는데 예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거부의사를 밝혔다. 면에서 여러 차례 창씨를 강요하고 협박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마침내 주재소가 나섰다.

창씨 문제를 둘러싸고 식민권력과 일기의 주인공 사이에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그러나 주인공의 신변에 큰 문제가 일어나진 않았다. 이후의 일기에서도 창씨 때문에 주재소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끝내 창씨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인수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일본식 이름이 없이는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취직을 하거나 배급표를 받을 수도 없었다. 조선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총독부는 허가증을 발급해주지 않았고 우체부는 우편물을 배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조선인들이 새 이름 안에 자기의 조선이름, 고향, 중요한 가문의 특징을 기발한 방법으로 반영해 넣었다.
 

힐디 강의 <검은 우산 아래에서>(2011, 산처럼) 속 구술자 중 한 명인 김원극(1918년생)씨는 여러 차례 종친회를 열어 창씨개명에 따를지 여부를 놓고 격한 토론을 벌였다고 진술한다. 세 번째 회합 만에 집안 큰 어른의 결정으로 창씨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씨는 “적어도 우리 지역(함북)에선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징용의 최우선 대상이 됐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가네쿠니(金國), 가네자와(金澤), 가네다(金田), 최(崔)씨는 야마모토(山本), 이(李)씨는 기모토(木元)라고 이름 짓는 식으로 자기의 정체성과 전통을 보호하고자 했다.

강제적 동원 후
죄인 다루듯 관리

정강일기의 주인공 김주현은 노동력의 강제동원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월19일자 일기에 따르면, “17∼55세의 조선 인민을 모두 저들의 모집 징용 장부에 기재하였다. 그 명목은 병정이요, 군속이요, 역부요 하며, 연령징용, 일반징용, 특별징용의 구별이 있다. 여자 역시 14∼25세로 미혼인 자, 과부인 자,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는 자는 방직공장과 군부조수로 징용한다.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 역시 끌어가니 이는 오랑캐요 짐승”이라고 해 강제동원의 유형과 실태를 잘 정리했다.

치재일기에선 조선총독부의 선전용어인 ‘산업전사’라는 명칭으로 동원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1941년 5월22일 장남이 산업전사로 부역을 나간 것이 최초의 기사였고, 1942년부터는 산업전사 선발에 관한 내용이 자주 언급됐다.

8월 이강길이 산업전사로 선발됐으나 나이가 많아 불합격한 이야기나 5형제 중 장남을 제외한 4형제 모두 일본으로 모집돼 간 집 이야기, 남양군도로 끌려간 이웃집 아들은 생사불명이고, 남겨진 부인과 딸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다는 내용 등 산업전사에 관한 내용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관란재일기에 따르면 중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937년에도 강제적인 동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흥의 해저철도 건설에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신청자 중 가지 않으려는 사람을 경찰이 강제로 데려갔다고 썼다. 문촌리(관란재일기 주인공이 사는 마을)의 국내동원은 주로 ‘근로보국단’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됐다.


정강일기에선 집안 머슴과 둘째 아들, 막냇동생이 징용령으로 신체검사를 받고 징용을 갔다. 일제의 징용은 구체제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렸다. 징용이라는 이름 앞에선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 월 평균 1회 이상 징용 관련 내용이 일기 속에 등장한다. 관란재일기와 치재일기는 모두 1944년 10월부터 산업전사나 근로보국단이 아니라 ‘징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정강일기는 “1943년 7월 저들의 북선 역부모집령이 몹시 심하여 소위 면리원이라는 자가 조석간에 마을마다 수색하여 저들의 공장에 부역할 만한 자(18세 이하 30세 이상자. 북선, 남양 등 정해진 바를 알지 못한다)를 보면 마치 죄인 다루듯이 바로 잡아간다. 이 같은 폐해가 2∼3달 가면 본지의 농사를 지을 자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적었다.

“창씨 안하면 징용 대상”
의식주 통제 실상 담아

치재일기의 1938년 12월엔 “오늘은 소위 군용모피의 독촉일이다. 저녁에 떠들고 요란을 피워 오늘 어쩔수 없어 기르던 개를 삶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제는 가마니, 개가죽, 돼지가죽, 백미, 대두, 면화, 누에, 소, 벼, 보리, 철기 등 전쟁물자를 민간에서 공출했다.

특히 군용 가마니를 할당 받아 온 가족이 모여 앉아 가마니 짜기에 열중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가마니 짜기는 중일전쟁 전부터 부업으로 장려돼 왔으나 전쟁 이후엔 군수용 가마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군용가마니 공출은 2차대전 내내 사람들을 괴롭혔다.

가마니 짜기가 완료되자 ‘앓던 이 빠진 기분’이라고 쓴 관란재일기의 주인공 정관해의 심정은 그 고충을 잘 표현한 것이다. 식민당국은 가마니공출을 마을 단위로 할당한 뒤 주민들 중 완수하지 못한 분량은 완료한 집에 다시 할당했다.


김인수는 “식구들을 거느리고 매일 가마니를 짜니 가소로울 뿐이다”라고 적었다. 양반인 그가 가마니를 짜는 데 익숙하지 못해 할당량을 채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마니공출을 완료하지 못한 집은 지붕을 새로 이는 것을 금지했다.

정강일기 1942년 9월엔 “군면이원이 또 모미(보리와 쌀)를 수색하러 출장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땅을 파서 5∼6일의 양식을 묻었다. 모두 가족의 바람을 따른 것이다. 다행히 저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오호 고소하도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숨겨둔 곡물이 발견된 집은 호주를 잡아갔다. 공출량이 부족하면 주재소에 고발하겠다고 하거나 태형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공출에 비협조적인 집은 징용을 보내는 방법도 썼다. 박창서가 반드시 공출 때문에 징용을 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주민들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전쟁에 따른 상시적 물자부족은 촌락공동체 내부에도 균열을 가져왔다. 관지리는 공동체의 유대감이 강한 편이었다. 변종근 집에 도둑이 들어 양식과 옷을 모두 도난당하자 모두 어려운 형편에도 십시일반 해 도와줬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도 누군가가 곡식을 숨겨둔 것을 주재소에 밀고했다. 관란재일기에도 유사한 사건이 발견된다.

정강일기에선 막냇동생 김주해를 비롯해 김한표, 변종배, 백민교 등의 기사가 있다. 사위 김한표는 벌금을 내지 못해 징용당한 경우다. 1944년 2월29일자의 일기를 보면, 하곡마을에서 징용대상자 전체가 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주재소는 가족을 감금해서 도망자가 출두하도록 했다. 출두하지 않은 집은 나이에 관계없이 사람을 끌고 가서 할당량을 채웠다.

정강의 장남도 징용을 피해 도망쳤다. 장남은 1943년11월에 황실불경죄로 체포돼 이듬해인 44년2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7월에 ‘전과자 징용령’으로 소환장을 받자, 몸을 피했다. 장남은 도피 도중 간간이 집에 들렀으나 연말까지 숨어있었다.

공포의 할당량
소극적 저항도

징용자들의 도주는 신문을 통해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유포시키는 기능도 했다.

정강일기 1945년 7월7일자 일기를 보면 징용갔던 “변한희가 일본 동경의 공장에서 도망쳐 와서 말하길, 동경은 영미의 폭격을 받아 거의 멸망에 이르렀다 한다. 듣고 보니 통쾌하지만, 왜놈들 죽는데 조선인도 죽으니 비통하다. 질아, 창흠, 병흠 소식이 거의 끊겨 우울하다”고 쓰고 있다. 전쟁 말기의 보도 통제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징용을 다녀온 이가 일본 본토의 공습을 전해준 것이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기에서 쉽게 확인되는 각종 국방헌금과 여러 유형의 공출은 전시체제기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며 “인적, 물적 수탈과 통제 하의 일상이 모여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으로 형성됐으며, 이것이 세대를 거쳐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다 된 밥’ 이재명 연임 시나리오

‘다 된 밥’ 이재명 연임 시나리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이 합심해 이재명 대표의 연임설에 군불을 때고 있다. 이 대표는 긍정의 뜻을 밝히지 않았지만 구태여 거절하지도 않았다. 주어진 시간은 3개월. 고심을 거듭한 이 대표의 선택은 무엇일까? 2022년 3월부터 쉼 없이 달려왔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이야기다. 이 대표는 지난 20대 대선서 패배한 후 곧바로 인천 계양으로 향했다. 지역구에 깃발을 꽂자마자 그해 8월에는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 대표직까지 싹 쓸었다. 지난해 9월, 윤석열정부에게 민주주의 파괴에 대한 사과 등을 요구하며 24일 동안 단식을 했고 올해 초에는 피습을 당해 수술을 받기도 했다. 죽지 않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 대표 임기를 3개월 앞둔 시점서 이번에는 연임설이 솔솔 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 대표는 당대표 연임을 묻는 질문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혀왔다. 지난달까지만 하더라도 “당 대표는 정말 3D(어렵고·더럽고·위험한 직을 일컫는 말) 중에서 3D다. 억지로 시켜도 다시 하고 싶지 않다”며 불출마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이 대표는 대선 패배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전당대회 출마 의사를 밝혔다. 대선서 패배한 뒤 6·1 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해 약 한 달 반 만에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것이다. 당에서는 이 대표의 선택을 만류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론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서 전당대회에 출마하는 것은 오히려 본인에게 독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이 대표가 출마를 고심한다는 풍문이 여의도를 돌자 그의 측근들 사이에서는 “스스로를 생각해서라도 자제하셔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국민의힘은 이 대표를 저격하고 나섰다. 당시 차기 당권주자였던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은 “전과 4범의 이력으로 뻔뻔하게 대선에 나서고 연고도 없는 곳에 나가 ‘방탄용 출마’로 국민들 부끄럽게 하시더니 이젠 제헌절마저 부끄럽게 만드나”라며 이 대표를 직격했다. 이어 “‘개딸(개혁의 딸)’들 같은 광신도 그룹의 지지를 받아 ‘어대명(어차피 당 대표는 이재명)’이라고 하니 ‘방탄 대표’ 이 의원의 당선을 미리 축하는 드린다”며 비꼬기도 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는 전당대회 출마를 공식화했다. 경선을 약 한 달 앞둔 2022년 7월이었다. 그는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대선과 대선 결과에 연동된 지방선거 패배의 가장 큰 책임은 제게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서도 “책임은 문제회피가 아니라 문제해결이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선 끝에 이 대표는 77.77%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대선서 패배한 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아 169석을 가진 거대 야당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고 당대표로 우뚝 연임-지선 코스 밟고 대선까지 쭉 당 대표직을 따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 대표의 정치 인생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친문(친 문재인) 세력이 주류였던 만큼 하루가 멀다하고 친명(친 이재명)과 비명(비 이재명) 간의 갈등이 불거진 탓이다. ‘심리적 분당’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오갔고 비명계 의원들의 도미노 탈당이 이어졌다. 총선을 앞두고 공천 과정서 또다시 계파 갈등이 불거졌다. 모든 과정서 비판과 화살의 끝은 이 대표를 향했다. 오는 8월을 마지막으로 이 대표가 자리서 물러설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총선이 끝나자 판세가 바뀌었다. 이번 선거를 승리로 이끈 이 대표가 한 번 더 당권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빠르게 확산한 것이다. 민주당이 이 대표의 연임을 원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첫 번째로는 정권교체다. 이번 총선서 압승을 거둔 이 대표의 능력이 입증됐으니 2027년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기세를 몰아야 한다는 것이다. 범야권까지 탈탈 털어도 대권주자가 마땅치 않은 모양새다. “윤석열 대통령의 맞수는 이재명 뿐”이라는 주장이 커지는 이유기도 하다. 두 번째는 인사의 부재다. 당장 전당대회가 4개월 앞으로 다가왔지만 당내 차기 당 대표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총선 후 자칭타칭 차기 당 대표로 지목된 이들이 여의도 입소문에 오르내릴 법도 하지만 사소한 소문조차 떠돌지 않는다. 이 대표가 연임을 시작으로 지방선거를 거쳐 대권주자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밟아도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이들이 없다. 이번 공천을 통해 다수의 비명계가 경선서 탈락하거나 탈당하는 등 대규모 물갈이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연임설에 최초로 불을 댕긴 건 5선을 달성한 박지원 당선인이다. 그는 지난달 15일 한 라디오에 출연해 “이번 총선을 통해서도 국민은 이 대표를 신임했다”며 “총선 때 차기 대통령 적합도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대표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대표 본인이 원한다면 당 대표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매끄러운 시나리오 최근에도 박 당선인은 “연임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가 없고 현재 당내서도 당 대표에 대해서 도전자가 없다”며 연임 가능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어 “전직 총리 등 중진들과 이야기해 보면 지금은 ‘이재명 타임’이라고 한다”며 “이 대표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당을 이끄는 것이 좋다고 전에 얘기한 것이 적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친명계 좌장으로 통하는 민주당 정성호 의원은 “이 대표의 연임은 당내 통합을 강화할 수 있고 국민이 원하는 대여 투쟁을 확실히 하는 의미서 나쁜 카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장경태 최고위원 역시 “국민의 바람대로 22대 개혁 국회를 만들기 위한 대표 연임은 필수 불가결”이라며 “부디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민주당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택, 최선의 결과인 당 대표 연임을 결단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주당 정청래 최고위원은 대표 연임 추대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겠다는 의지까지 밝혔다. 그는 “옆에서 가까이 지켜본 결과 (이 대표가)한 번 더 당 대표를 하면 갖고 있는 정치적 능력을 더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며 “당 대표 연임으로 윤석열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국민을 하나로 엮어내는 역할을 할 지도자는 이 대표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계열서 당 대표가 연임한 건 1995년 9월부터 2000년 1월까지 새정치국민회(민주당 전신)의 총재직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전례가 없는 일이다. 만일 이 대표가 연임에 성공한다면 민주당 역사상 두 번째로 남게 된다. 핵심 친명을 중심으로 이 대표의 연임이 기정사실화되면서 사실상 추대 수순을 밟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가 연임에 성공한다면 차기 대권주자로서 명분과 타이밍을 모두 챙길 수 있게 된다. 만일 이 대표가 연임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임기는 2026년 8월까지 연장된다. 하지만 민주당 당헌·당규상 대권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대선일로부터 1년 전 당 대표직을 사퇴해야 하는 만큼 2026년 3월까지 당직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2026년 6월에 치러질 지방선거를 3개월 앞둔 시점이다. 3개월은 공천 작업 등 선거를 치르기 위한 기반을 충분히 다져놓을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게 민주당 측 관계자의 설명이다. 민심? 당심? 엇갈린 선택 이번 총선에 이어 지방선거까지 이 대표 체제로 승리한다면 그는 더할 나위 없는 리더십을 얻는다. 2027년 치러질 대선에 출마할 명목도 다시 한번 다질 수 있게 된다. 이 대표의 연임이 확실시되는 분위기지만 그만큼 날 선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는 모양새다. 이 대표의 연임이 ‘사법 리스크 방탄용’이란 지적이 제기되면서 또다시 발목 잡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여권에서는 이 대표의 연임이 대장동 개발 특혜를 비롯한 성남FC 불법 후원금 의혹 등을 방어하기 위한 ‘매력적인 카드’에 지나치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는 이 대표 개인뿐만이 아니라 민주당 전체가 ‘방탄 정당’이란 오명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현실화될 경우에는 이 대표와 민주당이 함께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사법 리스크로 당내 신 비명 세력이 생기고 지방선거 결과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이 대표는 오히려 대권주자로서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게다가 이번 총선처럼 지방선거서도 압승을 거둘 것이란 보장도 없다. 따라서 이 대표가 그동안 쌓아온 업적을 보존한 채 한발 뒤로 물러서 숨을 고르는 게 좋은 전략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여의도에서는 실보다 득이 더 크게 보이는 만큼 총선 승리라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박수칠 때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일요시사> 취재진과 만난 자리서 “‘어차피 다음 당 대표도 대통령 후보도 이재명 당신이 될 테니 좀 쉬셔라’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총선서 좋은 성적표를 받지 않았나. 또다시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건 확률이 반반인 게임을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원대·의장 이어 ‘3톱’ 달성? 점점 멀어지는 포스트 우려도 이 대표가 연임한다면 2022년부터 2026년까지 내리 4년 동안 당권을 잡게 된다. 국민의 피로도가 누적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는 부분이다. 최근 당내 발생한 일렬의 사건에 모두 명심(이재명 대표의 의중)이 짙게 묻어났다는 지적이 나오는 만큼 이 대표에게도 정치적 휴식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앞서 지난 3일 민주당 신임 원내대표 선거가 열렸는데 다른 후보가 없어 경선을 건너뛴 채 친명 박찬대 의원이 찬반 투표로 선출됐다.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선거 후보군은 당초 4명이었지만 정성호·조정식 의원이 잇따라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교통정리가 이뤄졌다. 원내대표 선거와 국회의장 후보가 교통정리 되는 과정서 이 대표가 과도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 나온다. ‘포스트 이재명’에 대한 논의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황서 당의 무게 중심이 지나치게 이 대표 쪽으로 쏠릴 경우 민심의 후폭풍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전당대회까지 3개월가량 남은 만큼 민주당은 당의 흐름과 민심이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점도 의식해야 한다. <뉴시스>가 국민리서치그룹과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8~9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에게 이 대표의 연임에 관해 물은 결과 ‘찬성한다’는 응답은 44%로 ‘반대한다’는 응답 45%보다 1%p 낮게 나타났다. ‘잘 모르겠다’는 11%였다. 오차범위로 인해 반대 여론이 우세하다고 확실할 수는 없지만 민주당과 민심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의 중론이다. 정당 지지도별로 봤을 때는 더욱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찬성이 83%, 반대가 12%로 찬성 여론이 압도적인 반면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는 반대가 76%로 찬성(15%)보다 61%p 높게 나타났다. 무당층에선 반대 응답이 47%, 찬성 응답은 25%로 집계됐다. 해당 조사는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로 응답률은 1.5%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지금부터 이의 시간 이 대표는 떠오르는 자신의 연임설과 관련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민주당 박성준 대변인도 “당 대표 연임설과 관련해 의견 교류는 전혀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대표는 최근 들어 당 의원들에게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며 의견을 묻고 다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당의 수장이 아랫사람들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공당의 대표로서 당원들의 의견을 묻는 것은 당연한 민주적 절차”라는 게 민주당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재 여의도 안팎의 상황을 종합하면 이 대표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연임이 가능하다. 2027년 대선까지 앞으로 3년, 민주당의 운명은 이 대표의 손에 달려 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견제구 던지는 국힘 총선 참패의 먹구름이 채 가시지 않은 국민의힘에 다시 한번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연임에 성공한다면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날까지 윤-이 대결 구도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김민수 대변인은 지난 7일 논평을 통해 “이 대표의 민주당 사당화 전략은 반헌법적 행태”라며 일찌감치 견제에 나섰다. 김 대변인은 “민주당은 이 대표의 ‘점지’ 없이는 주요 보직에 자리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처절한 마음으로 국민을 바라보며 이 대표의 독주에 맞서겠다”고 밝혔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