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세월호특위 신축 사무실 가보니…

'문건 유출' 해양정책실 이상한 행보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세금 도둑'으로 매도된 세월호특위 사무실은 기획재정부가 소유한 나라키움 저동빌딩에 마련됐다. 새누리당은 지난 1월 이 빌딩의 임대료를 정확히 '예언'했다. 입주를 주관한 해양수산부 정모 사무관은 특위 내부 문건을 정부·여당과 공유한 바 있다. 거듭된 문건 유출 배후로 해양정책실이 지목된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세월호특위) 임시 사무실이 있는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조달청 본관. 지난 2일 세월호특위는 표결을 거쳐 정부가 입법예고한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시행령안(이하 시행령)'을 철회시키기로 의결했다. 앞서 이석태 세월호특위 위원장은 지난달 29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시행령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특위 파행 불가피

시행령에 따르면 세월호특위는 조직 규모가 대폭 축소(120명→90명)되고 진상규명을 비롯한 업무 추진 과정에서 정부의 영향(기획조정실장 파견) 아래 놓이게 된다. 또 상임위원(5명)을 제외한 파견 공무원의 숫자(42명)가 민간 조사·실무진(39명)보다 많아 독립성이 저해될 우려를 안고 있다. 시행령을 작성한 해양수산부 해양정책실 김모 주무관은 이날 통화에서 "아직 시행령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며 "의견을 반영하고 검토하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시행령 입법예고 기한은 오는 6일이다. 기한 종료 후 시행령이 확정되면 세월호특위는 파행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당장 이 위원장을 비롯한 다수 위원들은 시행령에 대한 위법·무효 확인소송 등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여당 추천 위원들은 '시행령 철회 요구' 표결에 불참하거나 반대표를 던지는 등 사실상 정부 안에 동조하고 있다.

새누리당이 추천한 조대환 세월호특위 부위원장은 지난 2월14일 4명의 여당 추천 위원과 함께 따로 해양수산부에 의견서를 보냈다. 정식 논의나 회의 없이 독자행동을 한 것이다. 김 주무관은 "(그들에게) 의견을 전달받은 것은 맞지만 별도의 법안(시행령)은 받은 적이 없다"라며 세간에 제기된 의혹을 부인했다.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에서 권영빈 세월호특위 진상규명소위원장은 정부의 시행령 작성에 여당 측 위원이 관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시행령에 적힌 문장 가운데 일부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여당 쪽 안에서 봤다"라며 "정부가 그 안을 그대로 짜깁기한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라고 말했다.

같은 날 이 위원장은 세월호특위 실무진에게 특위 활동 중단 지시를 내렸다. 임시 사무실을 비우고 새 사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하려던 이들은 단원고 유가족과 함께 거리로 내몰렸다.

지난 1일과 2일 기자는 서울 중구 나라키움 저동빌딩을 찾았다. 이곳 7층과 9층에선 세월호특위 사무실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는 4일까지 사무용품을 들여놓겠다는 공고도 있었다. 현장 관계자는 "9일이 입주 예정이라 그 전에 공사와 집기 배치를 끝낼 것"이라고 귀띔했다.
 

사무실 내부는 회의 공간이 많았다. 일부 칸막이는 투명 유리를 사용해 로비에서 방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됐다. 진상조사와 관련한 공간(조사실·녹취실·진상조사국 등)은 주로 7층에 있었다. 밀폐된 사무실 모퉁이 안쪽은 녹화와 녹음이 용이한 공간으로 전해진다.

사무실 예산만 삭감 없이 유지 왜?
새누리 문건 유출 정황 속속 드러나

위원장실과 부위원장실은 9층 양 모서리 끝과 끝에 있었다. 부원장실이 출구 쪽과 더 가까웠다. 부위원장실 옆에는 정책보좌관실이, 그 반대편에는 소위원장실과 비상임위원실이 있었다. 시행령이 강행 처리되면 진상규명위원장은 7층이 아닌 9층 사무실을 쓰게 된다. 특위 업무 정점에 있는 기획조정실은 설계 도면에 표시되지 않았다. 기획조정실장은 위원장이 아닌 부위원장(사무처장)의 지휘를 받게 된다.

인테리어 용역은 경쟁입찰이 아닌 '사후원가검토조건부 계약'에 따라 Y디자인과 D건축에 발주됐다. 관련 실무는 해양수산부 해양정책실 쪽에서 세월호특위로 파견된 정모 사무관이 담당하고 있었다. 정 사무관은 "긴급한 사유가 있었고, 단가 등을 고려해 적합한 업체를 선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세월호특위가 짠 최초 예산(240억원)에서 '사무실 임차보증금 등 청사 신설 및 확보비용'(이하 사무실 비용)은 65억8900만원이었다. 이후 특위는 내부 회의를 거쳐 예산 규모를 192억원으로 줄였다. 그런데 정부는 62억원의 예산을 추가로 삭감해 130억원의 예산안을 통보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사무실 비용만 예외로 뒀다는 것이다. 정 사무관은 "(예산안에서) 공사비가 아닌 (일반) 사업비를 삭감한 것"이라고 말했다. '진상 규명' 및 '안전한 사회 건설'이 목적이지만 사무실 마련과 유지에 더 많은 돈을 쏟는 역설이 발생한 셈이다.

앞서 정 사무관은 지난달 20일 '주간업무보고' 형태로 세월호특위 내부 문건을 청와대·새누리당·정부·경찰에 전달해 물의를 빚었다. 정 사무관은 "그 일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라고 대답을 회피했다.

지난 1월16일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은 세월호특위를 겨냥해 "이런 세금도둑적 작태는 용서치 말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김 의원은 세월호특위에 파견돼 있던 해양수산부 소속 김남규 서기관을 통해 내부 문건(최초 예산안 등)을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서기관은 지난 2일 통화에서 '김 의원 측과 연락을 주고받았냐'는 물음에 "오래된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부인했다. 현재 김 서기관은 해양수산부 해양정책실로 복귀했다.

놀랍게도 새누리당은 저동빌딩의 사무실 임대료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새누리당 김현숙 대변인은 "중구 청사 월 임대료가 1억2700만원"이라며 "진짜 조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실무자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브리핑했다. 확인 결과 세월호특위가 사용할 저동빌딩 사무실 임대료는 1억2730만원이었다. 유출된 자료가 없었다면 확언하기 힘든 내용이다.
 

시행령을 작성한 김 주무관, 문건을 유출한 정 사무관, 김 의원 측과 연락한 김 서기관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해양수산부 해양정책실(혹은 해양정책실 산하 기관) 소속이다. 정 사무관에게서 문건을 전송받은 강용석 대통령비서실 부이사관의 직전 근무지도 해양수산부 해양정책실(국제협력총괄과)로 확인된다. 현재 해양정책실은 새누리당 수석전문위원(농림수산식품위원회)을 지낸 연영진씨가 실장(1급)을 맡고 있다.

연 실장은 세월호참사 당시 새누리당 '세월호사고 대책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다. 앞서 김 의원은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간사와 위원을 지냈다. 한 국회 출입기자는 "상임위 간사와 전문위원이면 서로 모를 리가 없다"라고 지적했다. 기자는 '연 실장이 올 1월 정부로 복귀하면서 세월호특위와 관련해 김 의원으로부터 지침을 받은 것이 있는지' 물었지만 답변이 오지 않았다. 이와 관련 김 서기관은 "연 실장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 내가 판단해서 일했다"라고 주장했다.

거미줄 커넥션

연 실장이 정부로 돌아오자 그가 있던 국회는 대학 동문이 자리를 채웠다. 세월호사고 범정부대책본부 대변인을 지낸 박승기 새누리당 수석전문위원은 연 실장과 한양대 토목공학과 동문이다. 박 전문위원은 지난달 20일 정 사무관으로부터 문건을 받아본 정부 측 인사다. 지난해 11월 청와대에 파견돼 있다가 해양수산부 해양정책실로 복귀한 송상근 해양환경정책관 역시 정 사무관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해양정책실로 얽힌 수상한 커넥션이 세월호특위의 독립성을 흔드는 모습이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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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상)

[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1997년 말 국가부도 상황이 벌어졌다.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고 수많은 근로자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다. 자본금 수천억원, 국책은행을 뒷배로 둔 대형 증권사들도 고꾸라졌다. ‘절대 망할 리 없다’던 회사의 붕괴는 30여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피해자의 마음에 상흔으로 남아 있다. 산업증권 ‘파산의 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8년 10월21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공성진 의원이 한국산업증권(이하 산업증권) 파산 문제를 언급했다. 당시 공 의원은 “산업증권이 IMF 위기 시에 불·탈법적으로 강제 파산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산업증권은 한국산업은행(이하 산업은행)이 자본금을 100% 출자해 설립했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의 1인 대주주였던 셈이다. 망하지 않는다 이날 국감에서는 산업증권이 파산에 이르는 과정서 일어난 일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공 의원은 ▲산업증권 해산 과정서 이사회와 재정경제부의 허가 여부 ▲산업증권을 파산으로 끌고 간 1041억원 ▲개인명의의 계좌 ▲개인 계좌를 통해 한국산업선물로 흘러간 54억원 등에 대해 질의했다. 1998년 산업증권 해산 이후 10년 만에 당시 상황이 국감에 언급되면서 각종 의문이 제기됐다. 특히 개인명의의 계좌를 통해 오고 간 자금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다. MB(이명박)정부 들어 처음 열린 국감서 산업증권 파산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자 일부 언론은 이전 정부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국감에 증인으로 참석한 이충현 전 산업증권 채권관리팀장은 여전히 사건을 추적하고 있다. 현재 서울 강서구의원으로 활동 중인 그는 “외환위기 당시 좌파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범죄적 구조조정과 부정부패로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고 나라와 국민에게 회복 불능의 상처를 남겼다”고 일갈했다. 이 구의원은 산업은행에 근무하다가 산업증권 설립과 동시에 이직했다. 그는 산업증권이 파산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피해자이고 ‘강제파산’ ‘사기파산’ 의혹을 제기한 제보자, 산업증권강제퇴출피해대책위원장이자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원고로 26년을 보냈다. 그사이 소송서 패소했고 법적 시효는 끝났다. 그럼에도 이 구의원을 비롯한 피해자들은 산업증권 파산 사건을 놓지 못한 상태다. 산업증권에 근무했던 직접 피해자와 가족 등이 일한 간접 피해자들은 “IMF 사태였다고 해도 산업증권이 망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개인을 고객으로 하는 일반은행이 아니라 산업자본 조달을 위해 설립된 국책은행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산업증권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망했다. 400여명의 근로자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문제는 1997년 12월 IMF 사태 이후 1998년 해산, 1999년 파산 선고 때까지 석연치 않은 의문이 여럿 나온 점이다. 특히 청산 절차가 시작된 이후 개인명의 계좌를 통해 자금이 움직인 증거가 나왔다. 이 구의원이 가지고 있는 71개의 이른바 ‘비밀 통장’의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산업증권은 ‘산업은행이 발행하고 있는 산업금융 채권의 원활한 소화 및 국제업무 특화’를 목적으로 1991년 4월 설립됐다. 산업은행이 100%를 댄 초기 자본금은 1500억원에 달했고 1992년 11월 1000억원, 1998년 3월 1500억원을 증자해 1998년 7월25일 해산 당시 산업증권의 자본금은 4000억원에 이르렀다. IMF 사태로 증권사 강제 퇴출 산업은행 1인 대주주로 안정성↑ IMF 사태로 휘청이긴 했지만 산업증권은 명예퇴직, 임금 반납 등 고강도 구조조정을 통해 상황을 개선하려 했다. 산업은행 역시 산업증권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증자하는 등 위기 타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산업증권 본사에서 근무하던 이 구의원과 지방 지점에 있던 김영수(가명)씨는 “회사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98년 5월 산업은행에 새 총재가 부임하면서부터다. 특히 언론을 통해 ‘산업증권 연내 폐쇄’가 발표되자 내부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객과 채권자들은 동요했고 예금인출을 서두르는 등 대혼란이 일어났다. 당연히 신규영업도 줄어들었다. 영업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2개월 뒤 1998년 7월 산업은행은 산업증권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해산결의를 진행했다. 이후 1999년 2월 산업증권의 청산인은 ‘부채 초과 및 지급불능’을 이유로 파산선고를 신청했고 같은 해 3월13일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산업증권은 파산했다. 연내 폐쇄 발표부터 파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은 셈이다. 이 구의원에 따르면 산업은행의 산업증권에 대한 해산결의는 노동조합과의 퇴출 위로금 규모를 합의하는 사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산업증권의 노조위원장과 산업은행의 대표이사, 부총재 등이 퇴출 위로금으로 24개월치 임금을 지급하기로 구두 합의를 진행하는 과정서 해산이 결정됐다. 당시 산업증권 대구지점서 근무하던 김영수씨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명예퇴직으로 나간 직원들은 20개월치 월급을 받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산업증권이 망한 이후 나간 직원들은 퇴직금 수준의 돈만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산업증권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명예퇴직을 신청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이 구의원은 2010년 5월 산업증권 파산으로 직장을 잃은 피해자를 모아 산업은행, 금융감독원, 전 산업은행 총재와 부총재, 산업증권 청산인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산업증권 파산 과정서 피고들의 불법행위가 자행됐고 이로 인해 피해자(직원)가 생겼으니 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해달라는 취지다. 수장 바뀌고 급변한 기류 이 구의원은 “먼저 산업은행의 산업증권에 대한 해산결의가 적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또 파산 신청의 원인이 된 자본잠식 상황은 조작됐고 1041억원의 대지급도 실제 진행됐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무엇보다 산업증권 해산결의 이후 만들어진 수십여개의 개인명의 계좌와 이를 통한 자금흐름은 사기파산, 강제파산의 가장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1999년 2월 산업증권 청산인 명의로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한 파산선고신청서를 보면 ▲지급불능 ▲채무초과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1500억원에 달하는 산업은행의 유상증자, 대규모 인원 정리, 조직 슬림화 등 자구 노력에도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또 회계법인의 실사 결과 부채가 자산보다 많다는 점도 명시했다. 반면 이 구의원은 결산보고서와 회계법인이 청산 가치 기준으로 작성한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해산일 기준(1998년 7월25일) 자산이 부채보다 약 100억원가량 많다고 주장했다. 일반 채권자에게 변제해도 돈이 남는 만큼 파산이 아니라 청산 형태로 종결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산업은행은 청산이 아닌 파산의 방식을 택했다. 청산은 재산관계를 정리해 이를 분배하는 절차를 뜻한다. 파산은 회사의 총 재산을 총 채권자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절차다. 파산은 법원의 결정에 따라 진행된다. 산업증권이 청산으로 마무리됐다면 산업은행은 유일한 대주주로서 손해를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법원이 파산 결정을 내리면서 산업은행은 대주주이면서 채권자가 됐다. 산업증권의 파산과 관련해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041억원’의 존재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에 빌려준 단기자금으로 파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돈이다. 산업증권은 1998년 7월28일 ‘1998년 7월25일자로 회사 해산을 결의하고 청산 절차를 진행하던 중 1998년 7월27일 교환에 회부된 어음(금액 1041억원)을 결제하지 못해 1차 부도 조치를 당했다. 자체 자금 조달도 어려우니 추가 자금 지원을 부탁한다’고 산업은행에 요청했다. 의문점 많아 국감서 다뤄 산업은행은 이 돈을 산업증권 대신 갚았다(대지급). 다시 말해 산업증권이 산업은행에 빌린 돈을, 산업은행이 산업은행에 갚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산업은행이 대지급한 1041억원은 산업증권의 채무로 잡혔다. 이 과정서 부채가 자산보다 늘어나면서 산업증권 파산의 원인, 채무초과 상태가 됐다. 실제 회계법인이 작성한 1998년 10월31일 기준 산업증권의 부채는 2190억원, 자산은 1950억원이다. 부채가 자산보다 240억원 많다. 법원은 이를 근거로 산업증권의 파산을 선고했다. 240억원이 산업증권 파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 후폭풍은 400명이 넘는 산업증권 직원에게 미쳤다. 이 구의원은 산업은행이 대지급했다는 1041억원이 실제 거래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증권은 대지급 요청문서 ‘산업증권 청산 절차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라고 기술했고 현금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돼있지만 실제로 산업은행은 산업증권에 1041억원을 신규 지원한 사실이 없고 내부 문서에도 신규 추가지원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 구의원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파산 절차 과정서 ‘사후관리대지급금’으로 1041억원을 파산채권으로 신고해 2009년 5월 기준 파산채권의 100%를 돌려받았다. 산업은행 입장에서는 단 한 푼의 손해도 없이 대신 지급한 돈을 전부 회수한 것이다. 1041억원의 진실은 현재로선 알기 어렵다. 법원의 허가로 산업증권 메인 전산 서버가 파기된 상태기 때문이다. 다만 산업증권 청산 절차 과정서 개설된 통장은 실물로 존재한다. 이 구의원은 71개의 통장을 산업증권 전 직원에게 전달받아 보관해 왔다. 이 구의원은 해당 계좌들을 통해 수천억원에 이르는 자금이 움직였고 일부는 사용처도 불분명하며 최후의 사용처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비자금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문제가 제기된 부분은 또 있다. 산업증권과 같은 날인 1998년 7월25일 청산 절차에 들어간 한국산업선물(이하 산업선물)에 송금된 54억원의 성격이다. 산업선물은 산업은행의 자회사로 금융 선물거래를 위해 설립됐다. 파산으로까지 이어진 산업증권과 달리 산업선물은 1998년 정상영업이 시작되기 전에 청산 종결 처리됐다. 그런 회사에 1998년 8월11일 개인 명의의 계좌서 54억원이 이체된 것이다. 이 구의원은 “산업선물은 자본금 100억원의 회사로 산업은행 해산 당시 정식으로 영업개시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1998년 5월 산업증권 연내 폐쇄 발표가 난 상태서 산업선물에 54억원이라는 거액을 입금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1998년 7월부터 시중은행에 개설된 통장은 모두 개인 명의로 돼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계좌 명의자 가운데 2명이 산업증권에 대한 특별검사(1998년 7월25일~8월11일)에 투입된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 검사역이었다는 점이다. 직원 400여명 한순간에 길거리로 법적 판단 끝났어도 문제 제기 중 이 구의원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서 피고 측은 “1998년 당시 고객예탁금은 한국증권금융주식회사에 별도로 예치 관리되는 현행 제도와 달리 증권회사의 고유재산과 구분해 관리되지 않았다”며 “금감원(피고)은 특별검사 기간 중 고객예탁금을 안전하게 고객에게 반환되는 것을 보장하는 적법한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IMF 사태로 금융회사 파산이 일어난 것은 1998년 이전에 없던 일로 제도가 미비했고 방법을 찾던 중 금감원 검사역의 개인 명의를 이용, 계좌를 개설해 이를 고객예탁금 관리 용도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계좌를 개설했던 2명의 검사역 가운데 1명은 금감원에, 또 다른 1명은 증권사 감사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명의 계좌와 관련해서는 2008년 국감서도 다시 한번 언급된 바 있다. 국감서 공 의원은 2명의 금감원 검사역 외 계좌를 만든 또 다른 개인 명의자에게 “누구의 지시로 개인명의 계좌를 개설했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해당 인물은 “금융감독검사국 직원들 지시로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공 의원이 거듭 “산업증권의 자금을 개인, ○○○(명의 당사자)의 이름으로 관리하게 된 것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해당 인물은 “감독 당국의 지시에 의해서 한 것이다.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11년 이 구의원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서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며 피고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총 주식을 한 사람이 소유하는 이른바 1인 회사의 경우에는 주주총회 소집 절차를 밟지 않거나 총회를 개최한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도 1인 주주에 의해 의결이 있었던 것으로 주주총회의사록이 작성됐다면 그 내용의 결의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결의는 유효하므로 해산결의가 무효라거나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의 해산을 결의하는 과정이 절차적으로 하자가 없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해산결의 절차가 적법하고 유효한 이상 근로자에 대한 해고도 위법하지 않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또 소송을 제기한 시기가 사건 발생일 이후 10년이 경과된 상황이라 손해배상채권 시효가 소멸됐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이 구의원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법적인 판단은 끝난 셈이다. 정치적 이유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구의원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나섰다. 이 구의원은 2012년 법적 판결이 확정된 이후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왔다. 현재 이 구의원이 용산 대통령실에 넣은 청원은 경찰청 중대범죄수사과, 반부패공공범죄수사과 등을 거쳐 금감원으로 이송된 상태다. 이 구의원은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았다면 인수합병, 매각 등의 방식을 써도 됐을 일이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1인 대주주라는 점을 이용해 산업증권을 없애버렸다. 산업증권의 파산이 정치적인 목적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정부가 산업증권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고르면서 429명의 직원과 그 가족들은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