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그라운드 떠나는 ‘조선 4번타자’ 이대호

‘홈런 쾅! 쾅!’
세계기록 보유도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영원할 것 같았던 ‘조선의 4번 타자’ 선수 생활에도 끝이 다가왔다. 20년 넘게 프로야구 무대를 누빈 이대호는 ‘박수 칠 때 떠나는’ 길을 택했다. 그는 한 점의 후회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여전한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이제 남은 건 유일하게 이뤄보지 못한 꿈,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다.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그는 마지막 불씨를 살리려 구슬땀을 흘린다. 

스타 플레이어에겐 수많은 별명이 붙는다. 이대호 역시 많은 별명을 가졌지만 ‘조선의 4번 타자’만큼 이대호를 잘 설명하는 별명은 없다. 그는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KBO(한국야구위원회)리그와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로 군림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

이대호의 타고난 신체조건과 출중한 기량을 보면 그가 탄탄대로의 엘리트 야구인 코스를 밟았을 것으로 넘겨짚기 쉽다. 하지만 이대호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야구를 접한 선수는 손에 꼽는다. 그는 형과 함께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재가했다. 할머니는 시장 좌판에서 김치와 된장 등을 팔며 형제를 어렵게 키웠다. 

이대호가 야구와 인연을 맺은 건 지금도 절친한 추신수(SSG 랜더스)의 손에 이끌려서다. 롯데 박정태 코치(당시 선수)의 조카인 추신수는 야구를 하기 위해 부산 수영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그때부터 유난히 덩치가 컸던 이대호는 추신수 눈에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추신수는 감독에게 이대호를 추천했고, 이대호에겐 같이 야구하자고 설득했다.

당시 부산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야구란 종교와 같았다. 하지만 이대호는 ‘스카우트’ 제의에도 선뜻 야구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매달 몇 십만원에 달하는 회비는 곤궁했던 그에게 ‘오를 수 없는 나무’와 같았다. 야구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대호는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야구가 이대호의 운명이었다. 그의 삼촌들은 고민 끝에 그가 야구를 할 수 있게 힘을 합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듯 이대호는 천신만고 끝에 야구계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은 여전했고, 지원은 넉넉지 못했다. 이대호는 자신을 스카우트한 중학교 감독의 집에서 2년 반 동안 더부살이하며 야구 경력을 이어갔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이대호는 꾸준히 기량을 갈고 닦았다. 그 결과 부산 지역의 ‘야구 명문’ 경남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대호를 야구계로 이끈 추신수는 라이벌 학교인 부산고등학교로 향했다. 이대호와 추신수는 고교 시절 촉망받는 투수로 발돋움했다. 

이대호는 하루빨리 프로야구에 입성해 할머니를 호강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구슬땀을 흘렸다. 하지만 이대호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할머니가 고등학생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대호는 “할머니에게 제대로 된 효도를 하지 못한 게 영원한 한으로 남았다”고 자주 언급한다.

이대호의 뒷바라지는 일찍이 취업 전선에 뛰어든 형이 이어받았다.


이대호는 추신수·정근우·김태균 등과 함께 2000년 애드먼턴에서 열린 U-18 야구선수권대회에서 미국을 꺾고 우승을 이끈 주역이 됐다. 당초 지역 야구팀 롯데 자이언츠에서 재회할 것이 유력했던 이대호와 추신수는 또 다른 갈림길에 섰다.

추신수가 롯데 자이언츠의 1차 지명을 거부하고 미국 메이저리그(MLB)의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을 체결하면서다.

어려운 가정환경 딛고 국대 야구 선수로
타고난 신체조건과 유연한 동작으로 평정

반면 이대호는 추신수에 이어 롯데 자이언츠의 2차 지명을 받고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 입단 직후 어깨 부상을 당한 이대호는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 우용득 2군 감독이 이대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타자 전향을 추진했다. 

입단 첫해 이대호는 타자 전향 훈련을 받으며 2군에 주로 머물렀다. 그러다 시즌 막바지 용병 펠릭스 호세의 출장 정지 처분을 계기로 1군 무대를 밟았다. 이대호는 입단 첫해인 2001년 1군 6경기에 출장해 8타수 4안타 1타점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2002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군 감독으로 승격한 우용득이 이대호를 붙박이 4번 타자로 기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롯데 전력이 비교적 약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1군 경험이 거의 없는 신인에게 4번 타자를 맡긴다는 상황 자체가 이대호에 거는 기대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이대호는 개막전부터 4번 타자 출전했다. 시즌 개막 후 한 달간 홈런은 1개에 그쳤지만, 타율은 3할대 중반을 기록하며 신인왕 후보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신인들이 으레 그렇듯, 이대호는 시즌 중반으로 접어들며 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2군행을 통보받았다.

그러던 중 이대호를 적극적으로 밀었던 우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다. 후임 백인천 감독은 “이대호가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살을 빼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이를 위해 백 감독은 이대호에게 쪼그려 뛰기와 오리걸음 훈련을 지시했다.

거구인 이대호가 무릎 부상에 시달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이대호는 무릎 부상 때문에 2002년과 2003년 시즌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시점은 양상문 감독이 취임한 2004년부터다. 이대호는 이때부터 전 시즌 주전을 꿰차고 성장세를 그렸다. 이때 이대호는 타율은 낮아도 높은 파괴력을 자랑했다. 2004년 2할4푼8리 20홈런 68타점을, 2005년엔 2할6푼6리 21홈런 80타점을 기록하며 조금씩 가능성을 보였다.

문제는 병살타가 너무 많아 항상 의문부호가 따라붙었다는 점이다.

만개한 기량
압도적 성적


하지만 한국 야구의 전설적인 타자 장효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2004년 한 기자와의 대화에서 이대호의 성공을 일찌감치 확신했다. 장효조는 이대호가 194cm라는 거구임에도 뛰어난 유연성을 가졌다는 점에 집중했다. 그는 “(이대호가) 머지않아 터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장효조의 말대로 이대호의 기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만개했다. 2006년 이대호는 타율, 타점, 홈런 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84년 이만수(삼성 라이온즈)가 기록한 이후 22년 만의 트리플 크라운이었다. 이대호는 이를 통해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우뚝 섰다. 

이대호는 2007년 1루수 골든글러브 2연패,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등의 기록을 남기며 국내외에서 맹활약했다. 이후 2010년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대호의 2010년은 역대 모든 타자들의 이력 중에서도 손꼽히는 ‘커리어 하이’ 시즌이다. 이대호는 그해 도루를 제외한 모든 타자 기록 1위 자리를 휩쓸며 사상 최초의 타격 7관왕에 올랐다. 이 기록은 여전히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대호는 시즌 MVP까지 수상하면서 시상식에서 상 8개를 독식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아울러 9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면서 이 부문 세계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이 시즌 이대호가 기록한 홈런 수는 총 44개. 종전 롯데의 팀 최고기록 37개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국내 리그를 평정한 이대호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일본 프로야구(NPB) 오릭스 버펄로스 유니폼을 입은 이대호는 정규 시즌 144경기에 모두 4번 타자로 출전했다. 그는 91타점과 24홈런을 만들어내며 각 부문 1·2위에 올랐다. 


이후 오릭스에서 2년간 뛴 이대호는 2014년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해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대호는 우승 반지와 함께 한국인 최초로 일본 시리즈 MVP 선정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2016년 이대호는 소프트뱅크의 파격적인 제안을 뒤로한 채 또 다른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 메이저리그로 향했다. 연봉과 출전 보장 등의 조건을 크게 낮추면서, 정말 꿈 하나만 바라보고 감행한 모험이었다.

그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고정적으로 출전하지 못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14홈런과 49타점을 생산했다. 

2017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대호는 어느덧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노장이 돼있었다. 복귀 후 잠시 부침을 겪으며 “예전만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2017년과 2018년 모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가장 큰 부침은 2019년 찾아왔다.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는 15년 만에 최하위를 기록했고, 개인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그나마 개인 통산 300홈런을 달성한 것을 위안거리로 삼을 수 있었다. 

이대호는 2020년과 지난해 시즌을 거치면서 4번 타자 자리에서 내려왔다. 선수 생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무거운 책임감을 한결 덜어낸 셈이다. 타율은 3할을 살짝 밑도는 등 기대치는 채웠지만 특출나진 않았다. 김태균‧정근우 등 오랜 시간 함께 뛰어온 동갑내기 선수는 하나둘 은퇴를 선언했다.

결국 이대호도 지난해 시즌이 끝나고 은퇴 시기를 공식적으로 못 박았다. 2년 계약이 끝나는 올해가 이대호의 마지막 시즌이다. 그 사이 유한준‧이성우 등이 은퇴하면서 이대호는 리그 최고령 선수가 됐다. 처음 ‘은퇴 투어’가 논의됐을 때는 리그 안팎의 상황이 좋지 못해 이견이 갈렸다.

헤어질 결심
뜨거운 안녕

이에 부담을 느낀 이대호 본인도 고사하면서 무산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이후 10개 구단의 논의 끝에, 그의 공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은퇴 투어 시행이 확정됐다. ‘국민타자’ 이승엽에 이은 두 번째 공식 은퇴 투어다. 등번호 ‘10번’의 영구결번도 사실상 확정된 상황이다. 현재 롯데 자이언츠의 영구결번은 대투수 최동원의 ‘11번’ 뿐이다.

이대호는 지난 3월 자신의 마지막 KBO 미디어데이에 참석해 “마지막 전지훈련과 시범경기가 모두 끝났다. 후배들에게 마지막 시범경기라고 얘기했는데, 뭔가 울컥하는 게 있었다”고 심경을 전했다. 아울러 ‘친구’인 추신수와 오승환(삼성 라이온즈)을 두고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기 때문에 오래 더 좋은 성적을 가지고 그라운드에서 뛰었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건넸다.

이들은 모두 1982년생 동갑이지만, 이 중 이대호가 가장 생일이 빨라 최고령 타이틀을 떠맡았다.

추신수는 “대호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자라면서 많은 시련을 겪으며 이 자리까지 왔다. 부산에서 야구대회를 하면서 라이벌로 성장해오면서 (대호가)있었기 때문에 내가 미국까지 가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아직 은퇴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나도 겪어야 할 일이다. 당장 내년, 내후년이 될 수도 있다”며 “이렇게 박수를 받고 떠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야구를 전 세계에 알리고 떠나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대호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은퇴를 앞뒀다는 사실이 무색하도록 연일 불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팬과 리그에 전하는 마지막 ‘뜨거운 안녕’이다.

불혹을 넘긴 이대호는 롯데가 치른 경기 대부분에 나섰다. 그가 결장한 경기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타율 3할3푼3리, 18홈런 83타점 46득점 152안타 등 전성기 못지않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앞선 몇 년간의 시즌보다도 높은 성적이다.

베테랑의 투혼은 리그 전체 타격 지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타율 3위, 홈런 8위이고, 타점과 안타 각각 7위와 4위에 올라있다(지난 6일 기준). 또, 장타율과 출루율을 합친 OPS 역시 7위를 기록 중이다.

그와 경쟁을 중인 선수 면면을 살펴보면 이대호의 위상이 여전히 건재함을 확신할 수 있다. 리그를 통틀어 타율에서 이대호보다 앞선 선수는 외국인 용병 호세 피렐라(삼성 라이온즈)와 이정후(키움 히어로즈)뿐이다. 여타 기록에선 박병호(kt 위즈)와 김현수(LG 트윈스) 나성범(기아 타이거즈) 김혜성(키움 히어로즈) 등과 경쟁 중이다.

‘박수 칠 때 떠난다’ 현역 생활 마무리
‘이대호는 이대호다’ 마지막 목표 우승

이대호는 적게는 3살부터 많게는 16살까지 차이나는 후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웅을 겨루고 있다.

팀 내부적으로도 도드라지는 지표다. 이대호는 롯데 자이언츠 타격 지표에서 도루를 제외한 사실상 모든 부분을 이끌고 있다. 현재 이대호는 롯데 자이언츠 안에서 타율 2위, 홈런 1위, 타점 1위, 득점 4위, 안타 1위, 장타율 2위, 출루율 2위, OPS 2위를 기록 중이다. 

올 시즌 후반기 영입돼 표본이 적은 잭 렉스를 빼고 보면 이대호는 타율과 장타율, 출루율, OPS 등에서도 사실상 선두다. 은퇴가 목전인 선수가 무려 6개 부문에서 팀 내 1위를 싹쓸이하고 있는 셈이다.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은 마지막까지 이대호 몫이었다. 이대호는 지난 7월15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 10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소진하기도 전에 5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당당히 우승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이번 우승으로 이대호는 3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특히 3번 우승한 선수는 더러 있어도,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에 모두 우승해본 선수는 이대호가 유일하다.

여전히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는 이대호. 그만큼 은퇴에 대한 아쉬움은 커지는 법이다. 하지만 이대호가 은퇴를 번복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미 은퇴 투어를 진행하며 전국을 돌고 있는 데다, 지속적으로 은퇴를 번복할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이대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지난해까지는 관심이 없었는데 올해에는 야구에 재미를 붙였다. 내가 TV에 나오면 좋아하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나보고 ‘아빠, 야구 더 해’라고 한다. 작년에 이랬으면 올해 은퇴를 안 했을 것 같은데 남자가 한 번 말을 뱉으면 지켜야지 않나”라고 난감한 표정과 함께 농을 던졌다.

타들어 가는 롯데 팬들의 마음과는 반대로, 이대호의 은퇴 투어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마음을 비운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욕심이란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다. 

롯데는 6위에 올라 있다(지난 6일 기준). 가을야구 마지노선인 5위 자리의 기아 타이거즈와는 네 경기 차이다. 우승까지 갈 길은 멀지만, 가을야구라도 할 수 있다면 나름의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이 역시 잔여 경기 수를 감안하면 쉽진 않겠지만, 아직 포기할 수준은 아니다.

끝까지
최선을

특히 최근 기아가 3연패 수렁에 빠지면서 롯데가 순위 공략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다. 이대호 역시 “시즌 초반에 많이 이겼으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열심히 이기고 있다. 나도 선수들도 포기하지 않고 매 경기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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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