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그라운드 떠나는 ‘라이온킹’ 이동국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0.11.02 10:28:06
  • 호수 12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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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23년 축구인생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라이온킹’ 이동국이 그라운드를 떠난다. 한국 축구계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이동국이 은퇴 소식을 알리면서 축구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20세 축구 천재에서 41세 K리그 레전드로 파란만장한 축구 인생을 보낸 이동국의 발자취를 되돌아봤다. 
 

▲ 기자회견 갖는 라이온킹 이동국

이동국이 지난달 26일 자신의 SNS를 통해 은퇴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동국은 “아쉬움과 고마움이 함께 했던 올 시즌을 끝으로 저는 제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았던 그라운드를 떠나기로 했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라이온킹’
은퇴 발표

이동국 아내 이수진씨는 26일 자신의 SNS에 “학교 끝나고 차에 타서 아빠의 은퇴 소식을 처음 알리고 은퇴 발표 영상을 함께 보면서 어린아이들의 느낌은 어떨까 내심 궁금했는데 이렇게 폭풍 오열을 할 줄이야”라며 설수대(이동국의 자녀 설아, 수아, 시안)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게시했다.

이어 “아직 어린 애기들인 줄만 알았는데 너희들도 엄마와 같은 마음이구나. 절대 이런 상황에서 울지 않는 시안이까지 울음이 터지고”라며 “많은 분이 울면서 연락이 오셔서 종일 울고 또 울고. 우리 그냥 함께 마음껏 울어요”라고 남편 이동국 은퇴에 대한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다.

영상 속 설아는 아빠 이동국의 은퇴 영상을 보며 “아빠는 왜 그만두는 거야! 아빠 그냥 할아버지 될 때까지 계속하지” 함께 있던 수아와 시안이도 울먹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동국의 은퇴 소식에 과거 전북에서 그와 함께 뛰었던 이종호는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교과서. 공격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 플레이 영상을 찾아보며 감탄하며 배움을 얻었던 전설 이동국 선배와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그는 언제나 극복하는 사람이었다”며 “라이언킹의 새 출발을 축하한다"고 밝혔다.

이어 “함께 울고 웃었던 23년이었다”고 적었다. 이 지사는 “국민의 염원을 가득 담은 그라운드 위에 그가 있었다”며 “국민의 탄식도 환호도 모두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차범근축구상(4회)을 수상하며 잠재력을 드러낸 이동국은 1998년 프로 데뷔와 동시에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았다. 포철공고를 졸업하자마자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한 그는 축구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만 19세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187cm의 좋은 피지컬과 탁월한 골 결정력으로 황선홍을 이을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이목을 끌었다. 

축구팬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었다. 1997년부터 한국축구대표팀 상비군에 이름을 올린 이동국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 명단에 뽑혔다. 김도훈, 최용수와 펼친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진 못했지만, 잠재력을 인정받아 출전 기회를 잡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팀 직행
독일, 영국 등 해외진출 실패


당시 한국 축구는 1무2패로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0-5 참패를 당할 때 네덜란드전에서 후반 교체 출장해 나선 그는 주눅 든 선배들을 대신해 패기 넘치는 플레이로 네덜란드의 골문을 위협했다. 

이후 안정환, 고종수와 함께 ‘트로이카’로 불리며 K리그의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뛰어난 축구 실력과 준수한 외모, 개성 넘치는 매력을 갖추면서 많은 여성 팬들을 확보했다. 

1998년 K리그 최우수선수(MVP)는 고종수였다. 이동국은 당시 고종수에 밀려 신인왕을 거머쥐는 데 만족해야 했다. 1999년 MVP는 안정환이 수상했다.

데뷔 초반 이동국은 분명 리그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선수 중 한 명이었지만, 고종수, 안정환과의 비교에서는 주목도가 조금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팬들은 귀를 살짝 덮은 머리를 휘날리며 슈팅을 날리는 그에게 팬들은 ‘라이온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환호했다.

2000년은 특히 이동국이 힘든 시기였다. 2000년 1월 올림픽 대표팀 소속으로 호주 4개국 친선대회에 출전해 이집트, 나이지리아, 호주전에 출전했다. 쉴 새 없이 2월이 되자 A대표팀에 발탁돼 북중미 골드컵에 출전했다.
 

당시 코스타리카전에서 골을 넣기도 했다. 이후 소속팀 포항 스틸러스에서 K리그에 출전했고, 올림픽 기간이 다가오면서 9월에는 다시 태극마크를 달고 시드니올림픽에 나섰다. 당시 칠레전에서 골을 넣었고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2승 1패의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 토너먼트 라운드 진출에는 실패했다.

호주에 다녀온 이동국은 여전히 쉬지 못하고 10월 LG 4개국 친선대회,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안컵에 나섰다. 조별리그 3경기와 3~4위전까지 한 번도 쉬지 못한 채 출전했는데 6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2001년 1월에는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으로 임대를 떠나기도 했다. 교체로만 7경기에 출전한 뒤 경기장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당시 클라우디오 피차로, 아일톤 두 선수에 밀려 좀처럼 선발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면서 포항으로 복귀했다. 이동국은 베르더 브레멘에서 실패 원인에 대해 “내성적인 성격 탓에 동료들과 빨리 융화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동국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최종 명단에 들지 못하는 아픔을 맛본다. 프랑스월드컵 당시 상대 팀 사령탑으로 이동국의 인상적인 슈팅을 눈앞에서 지켜봤던 히딩크 감독의 결정이었다.

해외 고전
힘든 시기

많이 뛰는 축구, 공격수의 수비 가담을 강조했던 히딩크 감독은 이동국 대신 황선홍과 안정환, 최용수와 설기현을 선택했다. 뜻밖의 탈락에 이동국은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를 보지 않고, 폐인처럼 살았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최근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동국은 2002년 월드컵 직후 심경에 대해 “(2002년도에는)정환이형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2002년도에 스트라이커 4명 정도 뽑는데 4명 중 황선홍, 최용수, 설기현 선수 등이 있었다”라면서 “그 선수 중 컨디션이 좋은 선수들, 감독님이 선호하는 선수들 위주로 발탁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엔트리에서 탈락이 됐다”고 회상했다.

월드컵 직후 펼쳐진 부산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할 경우 이동국은 군 면제를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 주장이던 이영표는 이란과의 4강전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도 마지막 승부차기에서 실축했고 아시안게임 우승은 좌절되고 말았다.

월드컵에서 최종 명단 탈락과 아시안게임 우승 실패 등 국제대회로 인해 병역 혜택을 받지 못한 이동국은 결국 2003년 광주 상무에 입대, 군복무를 하면서 재기에 나섰다. 입대하자마자 27경기 11골을 터뜨렸다.

이동국의 K리그 첫 두 자리 득점이었다. 군복무 동안 그는 종횡무진하며 K리그서 51경기를 뛰며 15골-11도움을 기록했다. 권위적이었던 이동국은 상무에서 생활하며 성격이 바뀌었다고 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 

2004년 12월 국가대표 친선경기에서 이동국은 환상적인 득점을 기록하며 국내 팬들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부산에서 열린 독일과의 평가전에서 세계 최고 골키퍼 올리버 칸을 상대로 환상적인 발리슛을 성공했다.

지금도 이동국은 “한 골 한 골이 다 소중하지만, 독일전 발리슛을 했을 때 기억이 가장 많이 난다. 공이 발에 맞는 찰나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2005년 최고의 컨디션으로 맹활약한 이동국은 상승세를 이어갔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의 황태자로 불리며 월드컵 출전이 확실시됐다. 월드컵 두 달 앞둔 4월5일. K리그 경기 도중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면서 또 한 번의 월드컵 출전이 좌절됐다.

무릎 부상으로 수술을 받았던 이동국은 2007년 1월 ‘꿈의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이뤄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동국은 두 시즌 동안 정규리그 19경기에서 무득점에 그친 가운데 FA컵 4경기(1골)와 리그컵 2경기(1골)를 합쳐 25경기에서 2득점의 기록을 남기고 돌아왔다. 

이동국은 “프리미어리그는 힘든 리그였고 나도 최고의 컨디션은 아니었다”며 “하지만 미들즈브러에서 뛰면서 전술, 훈련방식, 소통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돌아봤다.

골, 골, 골…
K리그 전설

2008년 성남일화에 복귀해 1년 내내 뛰고도 2골밖에 기록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네티즌들은 “이동국은 끝났다”는 의견을 쏟아냈다.

끝난 것 같았던 이동국의 축구인생은 2009년 최강희 감독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전환점을 맞는다. 입단 당시 한물간 선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적한 이후 전지훈련 15경기에서 단 한골도 넣지 못한 이동국을 두고 최강희는 “골 못 넣어도 괜찮아! 10경기 골 못 넣어도 그 다음 경기 15경기에서 넣으면 된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라”라고 격려한다.

이동국이 10경기 넘게 골이 없었다는 것은 팀 성적도 연패를 겪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최 감독의 속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자의 성실한 모습을 믿고 오히려 믿어줬다. 그 후 이동국은 시즌 두 번째 경기에서 1349일 만에 멀티골을 터뜨리면 스승의 믿음에 보답한다.

이동국은 그해 득점왕(21골)과 최우수선수(MVP)에 올라 전북에 창단 15년 만의 첫 K리그 우승컵을 안겼다. 당시 K리그 최종전에선 500경기 출장 금자탑을 세운 경남 골키퍼 김병지를 상대로 멀티골을 뽑아내며 주인공 자리를 뺏었고, 친정팀인 성남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선 극적인 쐐기골로 우승을 자축했다. 전북 천하가 시작된 원년이었다. 

이듬해 월드컵과 인연이 없던 이동국은 드디어 꿈을 이뤘다. 이동국은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안정환, 김남일 등 노장들과 함께 발탁돼 12년 만에 꿈에 그리던 무대에 돌아왔다. 후배들에 밀려 선발로 나서진 못했지만,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 교체 투입돼 경기 종료 직전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비가 오는 바람에 이동국의 빗맞은 슈팅은 속도를 내지 못했고, 골라인을 넘어가기 직전 우루과이 수비수 고딘이 걷어내면서 경기는 2대 1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이동국의 마지막 월드컵은 그렇게 끝났고, 1998년과 2010년 두 번의 대회에서 선발 출전과 공격포인트 없이 51분의 출전 시간만 기록했다.

월드컵의 슬픔도 뒤로한 채 다음 해 소속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다.

네티즌들로부터 ‘골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공격수’라는 질타를 받자 리그에서 도움왕과 최우수선수를 차지했다. 2011년 ACL에서는 9골 몰아넣으며 득점왕 차지하기도 했다.

2010년부터 전북 소속으로 ACL에 출전하기 시작한 이동국은 그해 4골을 넣으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ACL에서만 무려 9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전북은 홈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알사드(카타르)에 패하며 준우승했지만 맹활약한 이동국은 2011년 ACL의 MVP가 됐다.

31세 최강희 감독 만나 ‘펄펄’ 
K리그 547경기 228득점 금자탑

2011년 중동의 한 클럽에서 이동국에게 거액의 러브콜을 보냈다. 건물 한 채 값의 거액을 제시한 팀이 있었지만 이동국은 거부했다. 거부한 이유는 부활하게 해준 감독님을 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당시 그의 아내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한 번 더 생각해봐. 감독님이 반대의 상황이라면 중동 가셨을 거야”라고 설득했었다. 이동국은 “내가 버림받는 건 괜찮은데 내가 버릴 수가 없다”고 말하며 스승에 대한 사랑과 의리를 보여줬다.

이동국은 월드컵 본선 무대에는 더 이상 서지 못했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국가대표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소집돼 한국의 월드컵행을 이끌었다.  더 이상 월드컵 무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동국은 K리그에서 새로운 기록을 꾸준히 썼다. 

K리그 최다 득점 기록 경신뿐만 아니라 2017년에는 K리그 최초로 70-70 클럽(70골-70도움)에 가입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K리그 최초 통산 300공격포인트(223골77도움)를 달성했다. 
 

도움도 77개로 역대 2위다. 1위는 110개의 염기훈(수원 삼성)이다.

아시아에서도 최고였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37골을 터뜨려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동국과 함께 전북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K리그 7회 우승, AFC 챔피언스리그 1회 우승을 기록하며 K리그 최고 명문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동국도 K리그 역사상 최초로 MVP를 4회(2009, 2011, 2014, 2015년) 수상했다. 이동국은 필드 플레이어 가운데 가장 많은 547경기를 소화하며 최다득점인 228골을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나게 됐다.

은퇴를 선언하면서 그의 향후 거취에도 관심이 쏠린다. 지도자 전향과 본격적인 예능 진출 등이 거론된다. 일단 이동국은 지도자 변신을 위한 준비를 이어간다. 은퇴 경기를 치른 후 11월 A급 지도자 자격증 교육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난 6월 1차 교육을 이수했고, 2차 강습을 앞두고 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A급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하면 국가대표팀과 K리그 코치로 활동할 수 있다. AFC A급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하고 고교 이상의 전문등록팀 지도 경력 5년을 채우면 P급 지도자 교육 과정을 신청할 수 있다. P급 지도자 자격증을 확보하면 대표팀 및 K리그 감독을 맡을 수 있다.

일단 이동국은 A급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한 뒤 프로 코치로 활약할 발판을 만들 것으로 보인다.

인생 2막
지도자로

또 예능인으로서 보다 많은 활동도 예상된다. 이동국은 그동안 다섯 자녀와 함께 KBS2 예능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 일상을 공개하며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큰 활약을 펼쳤다. 연예대상 후보로도 오르며 방송계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방송가는 이동국의 상품성을 높게 평가하고 출연 섭외가 이어졌으나 현역 활동으로 인한 출연 제약이 있었다. 은퇴를 선언한 만큼 자유롭게 예능 프로그램에 나설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옥의 티’ 이동국 과거 논란

이동국의 부친이 1998년에 병무청 직원에게 뇌물을 전달하는 수법으로 아들의 병역 비리를 청탁해 적발된 바 있다.

그의 부친은 병역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됐고, 최초 실형을 받아 교도소에 갔지만, 최종적으로 2000만원의 벌금형을 판결받았다.

이동국 부친의 병역비리 사실을 밝혀낸 사람은 김대업이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동국의 부친은 아주 적극적으로 아들의 병역면제를 위해 비리, 불법, 청탁행위를 저질렀고 심지어 병역비리계의 대부였던 박노항과도 접촉을 시도했다고 한다.

상당히 악질적인 방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의 병역비리를 청탁했기에 초범에 전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형, 그리고 최종심엔 2000만원이라는 거금의 벌금형까지 선고받은 것.

이동국 본인은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특별한 상해나 질병이 없었음에도 몇 차례나 부친의 병역비리 행각에 재검으로 화답했다는 점에서 의혹을 떨치기는 어렵다. 

2007년 아시안컵 기간 중 이동국은 이운재, 우성용, 김상식과 함께 인도네시아 현지 룸살롱에서 술판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상벌위원회는 음주 파문을 일으킨 선수 4명(이운재, 우성용, 김상식, 이동국)에 대해 ‘대표팀 경기 1년 자격정지’의 중징계를 내렸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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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된 밥’ 이재명 연임 시나리오

‘다 된 밥’ 이재명 연임 시나리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이 합심해 이재명 대표의 연임설에 군불을 때고 있다. 이 대표는 긍정의 뜻을 밝히지 않았지만 구태여 거절하지도 않았다. 주어진 시간은 3개월. 고심을 거듭한 이 대표의 선택은 무엇일까? 2022년 3월부터 쉼 없이 달려왔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이야기다. 이 대표는 지난 20대 대선서 패배한 후 곧바로 인천 계양으로 향했다. 지역구에 깃발을 꽂자마자 그해 8월에는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 대표직까지 싹 쓸었다. 지난해 9월, 윤석열정부에게 민주주의 파괴에 대한 사과 등을 요구하며 24일 동안 단식을 했고 올해 초에는 피습을 당해 수술을 받기도 했다. 죽지 않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 대표 임기를 3개월 앞둔 시점서 이번에는 연임설이 솔솔 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 대표는 당대표 연임을 묻는 질문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혀왔다. 지난달까지만 하더라도 “당 대표는 정말 3D(어렵고·더럽고·위험한 직을 일컫는 말) 중에서 3D다. 억지로 시켜도 다시 하고 싶지 않다”며 불출마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이 대표는 대선 패배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전당대회 출마 의사를 밝혔다. 대선서 패배한 뒤 6·1 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해 약 한 달 반 만에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것이다. 당에서는 이 대표의 선택을 만류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론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서 전당대회에 출마하는 것은 오히려 본인에게 독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이 대표가 출마를 고심한다는 풍문이 여의도를 돌자 그의 측근들 사이에서는 “스스로를 생각해서라도 자제하셔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국민의힘은 이 대표를 저격하고 나섰다. 당시 차기 당권주자였던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은 “전과 4범의 이력으로 뻔뻔하게 대선에 나서고 연고도 없는 곳에 나가 ‘방탄용 출마’로 국민들 부끄럽게 하시더니 이젠 제헌절마저 부끄럽게 만드나”라며 이 대표를 직격했다. 이어 “‘개딸(개혁의 딸)’들 같은 광신도 그룹의 지지를 받아 ‘어대명(어차피 당 대표는 이재명)’이라고 하니 ‘방탄 대표’ 이 의원의 당선을 미리 축하는 드린다”며 비꼬기도 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는 전당대회 출마를 공식화했다. 경선을 약 한 달 앞둔 2022년 7월이었다. 그는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대선과 대선 결과에 연동된 지방선거 패배의 가장 큰 책임은 제게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서도 “책임은 문제회피가 아니라 문제해결이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선 끝에 이 대표는 77.77%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대선서 패배한 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아 169석을 가진 거대 야당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고 당대표로 우뚝 연임-지선 코스 밟고 대선까지 쭉 당 대표직을 따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 대표의 정치 인생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친문(친 문재인) 세력이 주류였던 만큼 하루가 멀다하고 친명(친 이재명)과 비명(비 이재명) 간의 갈등이 불거진 탓이다. ‘심리적 분당’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오갔고 비명계 의원들의 도미노 탈당이 이어졌다. 총선을 앞두고 공천 과정서 또다시 계파 갈등이 불거졌다. 모든 과정서 비판과 화살의 끝은 이 대표를 향했다. 오는 8월을 마지막으로 이 대표가 자리서 물러설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총선이 끝나자 판세가 바뀌었다. 이번 선거를 승리로 이끈 이 대표가 한 번 더 당권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빠르게 확산한 것이다. 민주당이 이 대표의 연임을 원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첫 번째로는 정권교체다. 이번 총선서 압승을 거둔 이 대표의 능력이 입증됐으니 2027년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기세를 몰아야 한다는 것이다. 범야권까지 탈탈 털어도 대권주자가 마땅치 않은 모양새다. “윤석열 대통령의 맞수는 이재명 뿐”이라는 주장이 커지는 이유기도 하다. 두 번째는 인사의 부재다. 당장 전당대회가 4개월 앞으로 다가왔지만 당내 차기 당 대표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총선 후 자칭타칭 차기 당 대표로 지목된 이들이 여의도 입소문에 오르내릴 법도 하지만 사소한 소문조차 떠돌지 않는다. 이 대표가 연임을 시작으로 지방선거를 거쳐 대권주자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밟아도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이들이 없다. 이번 공천을 통해 다수의 비명계가 경선서 탈락하거나 탈당하는 등 대규모 물갈이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연임설에 최초로 불을 댕긴 건 5선을 달성한 박지원 당선인이다. 그는 지난달 15일 한 라디오에 출연해 “이번 총선을 통해서도 국민은 이 대표를 신임했다”며 “총선 때 차기 대통령 적합도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대표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대표 본인이 원한다면 당 대표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매끄러운 시나리오 최근에도 박 당선인은 “연임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가 없고 현재 당내서도 당 대표에 대해서 도전자가 없다”며 연임 가능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어 “전직 총리 등 중진들과 이야기해 보면 지금은 ‘이재명 타임’이라고 한다”며 “이 대표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당을 이끄는 것이 좋다고 전에 얘기한 것이 적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친명계 좌장으로 통하는 민주당 정성호 의원은 “이 대표의 연임은 당내 통합을 강화할 수 있고 국민이 원하는 대여 투쟁을 확실히 하는 의미서 나쁜 카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장경태 최고위원 역시 “국민의 바람대로 22대 개혁 국회를 만들기 위한 대표 연임은 필수 불가결”이라며 “부디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민주당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택, 최선의 결과인 당 대표 연임을 결단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주당 정청래 최고위원은 대표 연임 추대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겠다는 의지까지 밝혔다. 그는 “옆에서 가까이 지켜본 결과 (이 대표가)한 번 더 당 대표를 하면 갖고 있는 정치적 능력을 더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며 “당 대표 연임으로 윤석열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국민을 하나로 엮어내는 역할을 할 지도자는 이 대표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계열서 당 대표가 연임한 건 1995년 9월부터 2000년 1월까지 새정치국민회(민주당 전신)의 총재직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전례가 없는 일이다. 만일 이 대표가 연임에 성공한다면 민주당 역사상 두 번째로 남게 된다. 핵심 친명을 중심으로 이 대표의 연임이 기정사실화되면서 사실상 추대 수순을 밟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가 연임에 성공한다면 차기 대권주자로서 명분과 타이밍을 모두 챙길 수 있게 된다. 만일 이 대표가 연임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임기는 2026년 8월까지 연장된다. 하지만 민주당 당헌·당규상 대권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대선일로부터 1년 전 당 대표직을 사퇴해야 하는 만큼 2026년 3월까지 당직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2026년 6월에 치러질 지방선거를 3개월 앞둔 시점이다. 3개월은 공천 작업 등 선거를 치르기 위한 기반을 충분히 다져놓을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게 민주당 측 관계자의 설명이다. 민심? 당심? 엇갈린 선택 이번 총선에 이어 지방선거까지 이 대표 체제로 승리한다면 그는 더할 나위 없는 리더십을 얻는다. 2027년 치러질 대선에 출마할 명목도 다시 한번 다질 수 있게 된다. 이 대표의 연임이 확실시되는 분위기지만 그만큼 날 선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는 모양새다. 이 대표의 연임이 ‘사법 리스크 방탄용’이란 지적이 제기되면서 또다시 발목 잡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여권에서는 이 대표의 연임이 대장동 개발 특혜를 비롯한 성남FC 불법 후원금 의혹 등을 방어하기 위한 ‘매력적인 카드’에 지나치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는 이 대표 개인뿐만이 아니라 민주당 전체가 ‘방탄 정당’이란 오명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현실화될 경우에는 이 대표와 민주당이 함께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사법 리스크로 당내 신 비명 세력이 생기고 지방선거 결과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이 대표는 오히려 대권주자로서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게다가 이번 총선처럼 지방선거서도 압승을 거둘 것이란 보장도 없다. 따라서 이 대표가 그동안 쌓아온 업적을 보존한 채 한발 뒤로 물러서 숨을 고르는 게 좋은 전략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여의도에서는 실보다 득이 더 크게 보이는 만큼 총선 승리라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박수칠 때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일요시사> 취재진과 만난 자리서 “‘어차피 다음 당 대표도 대통령 후보도 이재명 당신이 될 테니 좀 쉬셔라’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총선서 좋은 성적표를 받지 않았나. 또다시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건 확률이 반반인 게임을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원대·의장 이어 ‘3톱’ 달성? 점점 멀어지는 포스트 우려도 이 대표가 연임한다면 2022년부터 2026년까지 내리 4년 동안 당권을 잡게 된다. 국민의 피로도가 누적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는 부분이다. 최근 당내 발생한 일렬의 사건에 모두 명심(이재명 대표의 의중)이 짙게 묻어났다는 지적이 나오는 만큼 이 대표에게도 정치적 휴식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앞서 지난 3일 민주당 신임 원내대표 선거가 열렸는데 다른 후보가 없어 경선을 건너뛴 채 친명 박찬대 의원이 찬반 투표로 선출됐다.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선거 후보군은 당초 4명이었지만 정성호·조정식 의원이 잇따라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교통정리가 이뤄졌다. 원내대표 선거와 국회의장 후보가 교통정리 되는 과정서 이 대표가 과도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 나온다. ‘포스트 이재명’에 대한 논의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황서 당의 무게 중심이 지나치게 이 대표 쪽으로 쏠릴 경우 민심의 후폭풍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전당대회까지 3개월가량 남은 만큼 민주당은 당의 흐름과 민심이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점도 의식해야 한다. <뉴시스>가 국민리서치그룹과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8~9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에게 이 대표의 연임에 관해 물은 결과 ‘찬성한다’는 응답은 44%로 ‘반대한다’는 응답 45%보다 1%p 낮게 나타났다. ‘잘 모르겠다’는 11%였다. 오차범위로 인해 반대 여론이 우세하다고 확실할 수는 없지만 민주당과 민심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의 중론이다. 정당 지지도별로 봤을 때는 더욱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찬성이 83%, 반대가 12%로 찬성 여론이 압도적인 반면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는 반대가 76%로 찬성(15%)보다 61%p 높게 나타났다. 무당층에선 반대 응답이 47%, 찬성 응답은 25%로 집계됐다. 해당 조사는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로 응답률은 1.5%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지금부터 이의 시간 이 대표는 떠오르는 자신의 연임설과 관련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민주당 박성준 대변인도 “당 대표 연임설과 관련해 의견 교류는 전혀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대표는 최근 들어 당 의원들에게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며 의견을 묻고 다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당의 수장이 아랫사람들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공당의 대표로서 당원들의 의견을 묻는 것은 당연한 민주적 절차”라는 게 민주당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재 여의도 안팎의 상황을 종합하면 이 대표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연임이 가능하다. 2027년 대선까지 앞으로 3년, 민주당의 운명은 이 대표의 손에 달려 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견제구 던지는 국힘 총선 참패의 먹구름이 채 가시지 않은 국민의힘에 다시 한번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연임에 성공한다면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날까지 윤-이 대결 구도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김민수 대변인은 지난 7일 논평을 통해 “이 대표의 민주당 사당화 전략은 반헌법적 행태”라며 일찌감치 견제에 나섰다. 김 대변인은 “민주당은 이 대표의 ‘점지’ 없이는 주요 보직에 자리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처절한 마음으로 국민을 바라보며 이 대표의 독주에 맞서겠다”고 밝혔다. <박>